KNUA Dance company in NY
해롤드 프린스는 ‘이유 없는 춤은 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참 독특한 연출가다. 제작자 출신으로 연출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제작자로서의 흥행 마인드를 놓치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늘 공부했고, 자신의 내면에서는 뭔가가 모자르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가 자신에게 모라자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과거의 무엇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다. 늘 옳다. 우리는 늘 새로운 트렌드가 무엇인가에 집착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은 과거에 깊이 천착해 있다. 어쨋든 해롤드 프린스가 ‘이유 없는 춤은 추지 않는다’는 말을 뮤지컬 무대를 가리켜 한 말이었지만 그걸 춤으로 뒤집어 보면 춤의 무대에서는 ‘이유 없는 걸음은 걷지 않는다’ 가 아닐까. 그렇다. 댄서는 무대 위에서… ‘그저’ 걸으면 안된다. 댄서는 한 순간도 무대 위에서 시간을 그저 때워서는 안된다. 그건, 직무유기죄에 해당된다. 그렇게 댄서를 한 순간이라도 버려두는 안무가가 먼저 죄값을 치러야 하지만.
이번이 두 번째라는 한예종의 KNUA 댄스 컴퍼니의 공연을 보았다. 첫번째는 한국무용이었는데, 이거 보면서 아주 기가 질려버렸다. 나는 춤 자체를 잘 모른다. 그러니까 별로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다. 내가 아는 건, 한국 춤에서 여자의 춤은 근본적으로 기생춤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물론 아니지만, 과거에, 그것도 그닥 멀지 않은 과거에 ‘가인’은 몸 파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우리나라 만의 일이 아니다. 가부키만 해도 여자의 출연을 금지시킨 이유가 여자가 무대에 오르면 사내들은 그녀들을 품으려고 닥달을 했고, 결국 돈은 거기서 벌렸기 때문이다. 풍기문란. 하지만 가부키가 남창으로서의 역할을 새로 담당하게 될 줄이야, 그걸 막은 쇼군께서는 짐작을 하셨거나 말거나. 어쨋건 무대에 서는 자는 자신의 ‘몸’을 내보이는 자다. 그 시절에 몸을 내보인다는 것은 이미 그 몸은 ‘주는’ 몸이라는 뜻이다. 왜 보여 ‘준다’고 하는가. 예수님 지적대로 생각만 해도 간음이라는 식의 몽상적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다. 존재하는 물적 존재로서의 ‘몸’이 눈 앞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은 천한 일이었다. 무대에 서는 몸은 보는 모든 사람들의 ‘소유’다. 그게, 지금에 와서는 티켓 사서 공연 보고 팬클럽에 가입하는 수동적인 행위라면, 그 당시에는 그 ‘가인’은 가질 수 있는 존재였다. 당연히 ‘가인’의 가치는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데 달려 있었다. 하지만, 작금에 와서, 작금에 와서도 마당이나 안방이나 폭포 가의 정자가 아닌 조명기 달린 무대에 서서 젊은 댄서들이 날 잡아 잡숴 춤을 추는 걸 보는 건 아연하다. 이 공연의 첫 춤이 바로 그랬다. 아니, 그게 춤의 의도였다면, 대단히 성공하신 게 맞다. 춤사위보다 먼저 눈꼬리 살살 내리며 눈웃음 치는 훈련 먼저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단했다. 무슨 춤에 그렇게 색기가 좔좔 흘러내리는지… 폴 테일러의 Esplanade를 연상케 하는 댄서들의 등퇴장은 가끔 손 끊긴 강강수월레처럼 보이기까지. 나쁘다 좋다를 떠나, 춤이 사람을 ‘홀리는’ 것은 정말 홀림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침 흐르는 좋은 반응이지만 그 홀림이 50년 전의 것이라면, 아주 생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게다가 비록 내가 50년 전에 태어났어도 저 홀림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님에야. 왜.. 왜… 왜…!! 라는 질문으로 가득찼던 첫번째 레파토리. 게다가 결코 그게 섹시한 것은 아니었다. 섹시한 게 좋냐, 라는 질문은 일단 뒤로 빼고.
두번째, 세번째는 … 마리우스 쁘띠빠와 발란신이었는데, 쁘띠빠는 그렇다 치고, 발란신이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만 가득 들었다. 독무 추는 댄서가 착지할 때마다 내가 다 걱정되더라는 말만 해두자.
네번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음악의 흐름과 몸의 흐름이 맞지 않았다. 이건 결코 음악의 박자와 몸의 박자가 맞지 않았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음악과 몸이 다른 연주를 하는 걸 보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없다. 하지만 때로는 몸이 음악을 배신하기도 하도 때로는 음악이 몸을 배신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배신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직무유기였다. 이 안에는 몇 가지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데, 특히 꼭 따지자면 두 번째 에피소드(였던 것 같다)에서 음악은(아니, 소리는) 극적일 정도로 뚝뚝 끊으며 긴장을 유발하는데, 댄서들은 설렁 설렁 걷는다. 그 순간 잠시… 분노를 느꼈다. 음악이 멈추면 댄서도 멈춘다는 건 우습다. 하지만 그 순간에 아무 긴장도 없이 ‘걷는다’는 건 일종의 배신이다. 그리고 무수한 하얀 공을 들고 노는 장면. 아이디어는 참 예뻤지만 예쁘기만 하고 끝났다. 그 많은 공들이 어떤 리엑션도 유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이 움직임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그저 살짝 부담스러운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메렝게나 한 판 질펀하게 한 번 추었으면 싶은 그런 흥겨운 음악에서도 댄서들이 줄창 ‘모던!’만 외쳤던 것도 지루. 정말 보기 좋았던 것은 달마시안 같은 젊은 댄서들의 힘이 남아도는 몸이었다. 가끔 한국의 ‘모던 댄스’를 보면서 갑갑하게 느끼는 건 모던을 낯선 움직임으로만 해석하려 드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짐작 때문이다. 불 위의 오징어처럼 뒤틀리는 동작들을 빠르게 나열하기보다는 음악 자체에 좀 느긋하게 귀를 기울이는 게 어떨까 하는 안타까움. 좀 더 넉넉하게 받아들이면 어떨까 하는. 내가 만약 스물이거나 혹은 스물 다섯 근처라면 이 춤을 보면서 댄서들의 테크닉이 모자란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어제 본 건 남아도는 힘이었다. 안무가 이들의 남아도는 힘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이들은 팔팔했다. 근육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해서는 당장이라도 날듯이 뛰어나갈 듯한 달마시안들이었다. 달마시안은 사냥개다. 하루라도 전력으로 달려주지 않으면 근육에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 죽는 개가 달마시안이다. 이들이 그랬다. 하지만 어제의 춤은 이들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원만 그리며 달리게 했다. 좋은 음악에 힘이 남아도는 몸이 있었는데도 그랬다는 건 안타깝다. 단지, 조금 안타까웠다는 것이지, 사실 전체적으로는 흐뭇할 정도로 좋았다. 그저… 조금 더, 조금 더 바라는 것 뿐이다. 달마시안, 달려!
가장 개판은 조명이었는데, 시간 문제였는지 셋팅에 실패한 듯 했다. 댄서들이 조명 너머로 사라지는 걸 1시간 반 동안 봐봐. 조명 다 뿌개고 싶지. 의상… 마지막 작품만 빼고, 어쩌면 그리 소재가 초지일관 하신지… 그것도 일종의 컨셉이라면야, 뭐.
kabbala said,
12월 7, 2006 at 2:40 오후
다니는 학교 이야기가 나오니 반갑네요;;;
날라리아 said,
12월 7, 2006 at 11:51 오후
춤에 너무 박한 몸을 가진 나는^^; 어떤 춤이던 춤을 잘 추는 사람이 부럽기만…이유없는 인생을 살면 안되겠는데 대체 나는 어떤 이유를 가지고 사는 걸까.
마녀 said,
12월 8, 2006 at 6:39 오후
kabbala : 네, 반갑습니다.(으음… 이게 아닌가… ^^;;;)
날라리아:그런 건 묻는 게 아닐세. ㅋㅋ
R. said,
12월 10, 2006 at 12:43 오후
마녀님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저도 춤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저 여인네가 예쁘네, 저 남정네는 근육이 좋네.’정도의 감상밖에 없지만요.:-)
마녀 said,
12월 11, 2006 at 7:26 오전
오히려 더 재밌게 보실 것 같은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