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ressing the Czar
윌리엄 포사이드. 명성이야 자자하지만 그의 춤을 직접 무대에서 본 건 이번을 포함해서 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은 단연 최고였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그의 움직임. 86년 작품이 이토록 되바라질 수 있고 이토록 잘 정리될 수 있는데 왜 그의 움직임은 갈수록 간결해져가는지… 자취를 더듬어 봐야 되나 싶을 정도.
멍때렸던 인트로 1막, 심장을 꼭 조여서 한 치도 풀어주지 않던 2막, 그리고 모든 걸 다 풀어놓고 아하하 웃고 즐기게 해준 3막. 하나의 형식 안에 가둔 여성이라는 몸과 남성이라는 몸의 절대적인 차이와 그 즐거움이라니. 역시나 춤추는 몸은 늘 옳다.
Mulholland Drive (2001)
데이빗 린치는 미쳤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아주 가볍게 미친 놈이야, 그거. 하고. 하지만 영화를 보면 미친 머리로 나올 수 없는 퍼즐맞추기가 있다. 그런 면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너무 많은 것을 다 보여준다. 마지막 30분 정도는 긴장이 완전히 다 풀어져서 그저 앞 부분의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만 끄덕끄덕 하는 거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치는 대단한 린치를 가했다. 자정 가까운 시간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떠내려간 엠뷸런스 때문에 잠이 홀라당 깬 다음 억지로 눈을 붙이고 있다가 바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두 노인네의 공격. 눈까풀을 옅게 떨며 내 머리를 잠식한 꿈은 그지같은 드라이브의 재구성. 린치는 꿈을 잊지 않는 사내다. 아무래도 트윈픽스 박스셋을 사야 되나. 딸려 들어가기 싫다. 영화의 퍼즐이 너무 쉬우면 조롱당하지. ABC가 싫어할만도 했다. 여전히 린치가 좋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창 좋은 감독이라면 코헨네와 린치. 시리즈로 만들었으면 또 박스셋을 사네 마네 중고 사이트 알아보고 앉았을테지. 초지일관 등장하는 마녀는 이제 친근하기까지.

| Llorando ©1994 |
Written by Roy Orbison |
Crying ©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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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 estaba bien por un tiempo Yo que pensé que te olvidé |
“Llorando” video c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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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alright for a while I thought that I was over you |
뉴욕은 개싸가지?
뉴욕의 극장과 얘기하다가 거짓말 안 하고 강만 건너거나 한 시간만 나가면 뭔 극장들이 다 송구스럽게 친절한지, 나도 모르게 ‘진짜가?’ 하고 되묻곤 한다. 서울에서 처음 여길 왔을 땐 여기 사람들의 가식만빵의 웃음에 넘어갔지만 시골 한 번 가보니 가식이라곤 없는 천진난만한 웃음에 화들짝 놀랐었다. 어차피 이 신의 사람들은 까탈스럽다.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만고불변. 그래도 오랜만에 참 … 다정한 통화를 하고 보니 괜히 감격. 이젠 갈 길을 찾아야 하는데 머리 아프다.
No country for old man
아이구, 20년 전에는 돼지 뒷다리로 사람 패죽이더니 이제는 상콤한 단발머리로 나를 잡네. ㅋㅎㅎㅎㅎ 아유. There will be blood 와 함께 근래 보기 드문, 제목이 기가 막힌 영화다. Extacy, ah, Extanyo! 손바닥 비비며 마늘 씹어먹던 판자 디스코텍 눈에 선하다.
우연인지 악연인지…
심포니 스페이스를 갈 때마다 거의 확실하다 싶은 확률로 비가 내린다. 그것도 주륵주륵. 다섯번째인데, 그 중 네 번이 비였고 그나마 나머지 한 번도 들어갈 땐 안 내리던 비가 나올 때는 퍼붓고 있었다. 물론 오늘도 비다. 그래도 트와일라 사프라고 끙차 기어나가는 건 장한데, 봄철 알러지 때문에 스스로 주변에 민폐가 될 거라는 두려움에 떨고있다. 그지같은 봄날의 끝은 45도의 날씨에 짱짱하게 얼려주는 쿨러렷다.
인간의 존재에 ‘존엄’을 붙일 수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스스로를 비춰 보더라도 다른 인간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다. 믿자, 믿자고 수많은 매체들이 말하는 이유는 결코 믿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뿐이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의 위대함이 그의 위선과 그의 나약함을 밟고 일어서게 해주는 인간도 간혹은 있다는 사실에는 모골이 송연하다. 자세한 리뷰는 시간 날 때 다시. 필립 그라스는 음악 그 스스로가 무대를 연출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이번에 다시 재확인 했으며 사랑스러운 엽기 괴짜 맥더못이 이제 다른 문을 열고 거장의 대열에 편입했음을 확인했다. 
Where were you when I was getting old?
제리 스프링어의 2막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몰아붙이는 대사다. 2막에서 제리가 억지로 떠맡은 토크쇼(0r fucked up ass with barbed wire ㅋㅋ) 아담과 이브도 사과 한 알 따먹었다고 이 지랄이냐며, 애 낳고 아플 때, 자식놈들이 서로 때려 죽일 때, 그 때 당신은 어디 있었느냐고 예수에게 지랄을 해댄다. 그 때마다 예수가 하는 대답은 ‘내 손의 상처를 보고 그런 말을 하냐?’는 항변. 악마는 ‘이 천 년 동안 써먹고도 아직도 지겹지 않냐!’고 지랄.
’내가 고통받을 때 예수님 어디 계셨어요?’ 는 아주 오래된 기독교 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의문이었다. 금관의 예수의 가사를 떠올려 보라. 대체 한국이란 나라에 신의 은총 따위가 있기는 있었나 싶었던 지지리 암울한 시절 동안, 대체 신은 어디서 뭐하고 자빠져 있었더란 말이냐.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아무 의미가 없어졌음을 이 쇼는 보여주고 있다. 즉, 신의 존재유무, 신앙심의 유무가 이미 사람들에게 아무 고뇌도 고통도 주지 않는다. 이 질문에서 마리아의 촛점은 내가 고통받고 있었다는 게 아니다. 마리아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가 늙어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가 어째서 마리아에게 젊음을 돌려주지 않는가. 하다못해 서저리 비용이라도 대줘야지. 물을 포도주로 만들면서 어째서 돌을 금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하는가 말이다. 불과 20년 전 만 해도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었던 존재론… 의미 없음. 에 대한 조롱. 이미 반기독교니 신성 침해니의 개념 따위는 요단강도 사틱스도 다 건넌지 오래인 질문이다. 지금, 오늘 의미있는 질문은,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돈지랄 하며 젊게, 자극받으며 사는 것. 아름답게 ‘보이는 것’ 뿐. 사유가… 의미가 있나? 오늘은 몰라도 내일도? 그저 주워 처먹으며 사는 거 말고… 더? 이 작품을 보고 등골이 서늘한 건… 그래서 나 뿐이 아닐게다. 도덕성의 해이니, 신성모독이니 하는 따위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으니까.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국립극단의 배우들이 ‘연기’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고자 스스로 기획하고 저예산으로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에서 올리고 있는 ‘스튜디오 배우 열전’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첫 작품이 꽤 신선했다는 평이 있었지만 놓쳤고 두 번째 작품이라도 보자고 생각하여 도전했는데 하필 두 번째인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노로그. 크헉! 결론부터 말하면, 술 취한 79학번 선배에게 불려나가 80분간 찌질한 신세타령을 졸지도 못하고 무릎 꿇고 듣고 앉았는 바로 그런 드러운 기분. 대본만 곰곰히 들어보면 무척 재밌을 수도 있는 부분도 있고 관객의 긴장을 완화시킬 부분들이 적절하게 들어있건만 이놈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는 시종일관 진지하셔서 아주 진짓상을 말아드시더만. 고흐는 살아 생전에 찌질한 조울증 환자에 알콜 중독, 못생기고 돈 없는, 여자 밝힘증의, 유명해질 리가 없는,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알 수 없는, 소리만 고래고래 질러대 말썽 대마왕인 그저 그런 환쟁이었다. 그러나 이 배우가 연기하는 고흐는 이미 거장이셔, 거장. 게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무대 디자인. 여기 저기서 모은 ‘그럭저럭’ 모던해 보이는 장치인 천장에서 전구 늘어뜨리기, 바닥에 높이가 다른 원주 늘어놓기, 배경에 세 장의 대형 캔바스 설치하기.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효율적이지 않은데다, 뭔가 채우려는 몸부림 외의 어떤 의미도 없다. 이를테면 전구를 보자. 노란 백열전구 서른 네 개는 고흐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노랑이더냐. 그러면… 키는 시점이나 끄는 시점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더냐. 왜 켜져 있는지 전혀 의미가 없더구만. 게다가 뒤의 캔바스 셋… 나중에 고흐가 그 뒤로 들어가 먹칠을 하는데… 왜 그르슈? 먹칠을 하면서 또 웅얼웅얼… 그게 아주 짜증이었다. 결국 뭔가 퍼포먼스를 하고 싶었던 거야? 또 높이가 다른 원주 열 넷. 그보다는 차라리 고흐의 방에 놓여있던 그 의자 한 개 놓아두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 열 넷의 원주는 키 작은 그 배우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것도 있어서 거기 걸터 앉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아주 짜증날 지경으로 엉망. 게다가 극이 종반에 이르면서는 배우의 힘도 다 해서 아주 그 때부터는 기계적으로 대사를 외우기 시작. 잠을 자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그렇게 굴곡 없이 편지만 읽으시니 본인도 힘드시겠습니다. 굴곡이 없었냐… 아니… 뭐 소리를 지르기고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고함도 지르지만…어므 다 같은 말이네? 라는 그런 말입니다. 암튼 배우에게 마지막 그나마 박수라고 쳐준 것은 80분 분량의 대사 외우느냐 고생 많았다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동행은 아주 식후의 단 잠을 주무시더라. ㅎㅎㅎㅎ 배우도 관객도 행복한 모노로그를 보여주시라, 제발. 서로에게 못할 짓 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나는 고흐가 두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검은 셔츠, 검은 바지를 입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쯤 해둬. 아무리 검정이 배우들의 색이라고 해도… 이미지상으로 무대 전체가 검정이었다. 검정. 마지막의 그림마저도 검정. 대사톤도 검정. 그렇게 다 먹칠을 해버리고 싶다면… 20분간 불을 끄고 관객을 재우지 차라리.
하지만 트러스에 매다는 조명을 최대한 자제하고 색을 사용하기 보다 자연스러운 색감을 이끌어내고 배우의 얼굴에 집중한 조명은 좋았다. 더불어 한국말을 한국말로 끊어내는 배우 김종구의 말하는 법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말하기는 십 분이 지나가 같은 리듬, 같은 높낮이로 시종일관하여 아무 매력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원주 숫자와 전구 숫자를 세고 앉았던 스스로에게 애도를.
믿어져?
예를 들어보자. 십대 소녀가 있어. 그런데 벌써 결혼할 남자가 있지. 게다가 그는 중년 돌입. 그런데 미처 결혼도 전에 이 소녀가 임신을 했는데 약혼자는 손도 안댔다지, 이 소녀는 아직도 처녀라고 우기지 미치겠는 거야. 말하자면 십대 미혼모가 될 판인데, 이 십대 왈 자신을 임신시킨 건 가브리엘 천사 아니면 하나님 그 자신이라는 거야. 물론 처음 본 사이지. 잠깐, 그러면, 강간? 아니면 보자마자 눈 맞은 거네? 제리 스프링어 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케이스로군. 문제는 이 소녀가 이천 몇 년 전에 아기를 낳은 버진 메리라는 거야. 자 버진 메리가 아들을 낳았어. 중년인 남편은 그동안 십대인 아내에게 손도 안댔다더군. 어쨋든 낳았어. 이 아들이 서른 셋이 되어 죽을 때까지 여자랑 한 번도 안 했다는 거야. 어머, 그렇지, 게이네? 뭐 그런 거지. 문제는 이 아들이 예수라는 것 정도랄까. 뭐 그런 거야. 그래, 너라면 믿을 수 있어? 제리 스프링어 쇼를 보면서 미국놈들 개말종 새끼들 하고 욕하잖아. 그런데 뭐 스토리가 딱 그렇네. 누가 그러드라. 믿어지는 게 바로 ‘은사’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특별한’ 은사야. 제리 스프링어 오페라는 바로 그런 얘기야. 신이 존재할 수도 안할 수도 있어. 하지만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종교 집단이 권력인 건 구역질 나거든. 그래도 하나 즐거운 건, 이젠 우리는 아무도 교회의 시위를 두려워 하지 않아. 아, 두렵긴 뭐가. 오히려 너무 신나. 훔쳐 먹는 사과가 더 맛있고 하지 말라는 수영이 더 신나는 톰 소여 일당의 밴 하퍼처럼 우리는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악마의 작은 공범자가 되어 낄낄 웃으며 공연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어. 그러니 부디 앞으로도 잘 부탁해, 시위대 여러분. 재공연 때도 잊지 말고 찾아 주기야.
고민…
패트릭 스튜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연기를 바로 눈 앞에서 본다면야 그의 듣기좋은 잔잔한 목소리를 침 맞아 가며 다 즐길 수 있겠지만 실제로 천석이 넘는 극장에서는 맨 앞자리도 맨 뒷자리만큼이나 괴롭다. 하지만… 하비 극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이곳이라면 단연 앞자리 불사. 문제는 역시 패트릭 스튜어트다. 런던에서 이 양반이 바로 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런던의 짧은 일정 가운데 이 양반의 맥베스를 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미 이 양반의 약한 발성에 학을 뗀 적이 있다. 해롤드 핀터의 The Caretaker 에서 이 양반이 바로 그 ‘늙고 더러운’ 노숙자 영감이었다. 어찌나 실망을 절절하게 했는지 노인네에게 박수 쳐줄 기운이 남질 않았었다. 그런데 맥배스라… 그것도 리미티드 공연이다. 함께 온 배우둘은 RSC 배우들이다. 지난번처럼… 다른 공연자들을 믿고 봐야 하나. 문제는 이거 또 패트릭 영감 나온다고들 아주 환장을 하며 달겨들어서 이렇게 고민하다가 표가… 표가 사라진 뒤에는 후회해도 늦는다는 웃긴 사실. 아니 … 뭐랄까… 봐야지. 가끔… 런던에서라면 열외가 될 작품이 뉴욕에 와서 봉이 되는 꼴을 보는데, 이것도 그렇다. 뱀은… RSC 의 뒷구녕으로 정녕 전락하기로 결심했냐? 가지고 와도… 너무 돈 되는 걸로만 가져오려고 하는 그 속셈이 너무 빤히 보여. 게다가 RSC 도 기획 자체를 돈되는 기획으로 잡는다. 원래 안그랬다고는 말 못해도… 요즘은 뱀과 함께 너무 짜고 치는 고스톱에 판돈 거드는 찜찜한 기분 어쩔 수가 없다.
사진은 뉴욕 타임즈, The Caretak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