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ressing the Czar
윌리엄 포사이드. 명성이야 자자하지만 그의 춤을 직접 무대에서 본 건 이번을 포함해서 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은 단연 최고였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그의 움직임. 86년 작품이 이토록 되바라질 수 있고 이토록 잘 정리될 수 있는데 왜 그의 움직임은 갈수록 간결해져가는지… 자취를 더듬어 봐야 되나 싶을 정도.
멍때렸던 인트로 1막, 심장을 꼭 조여서 한 치도 풀어주지 않던 2막, 그리고 모든 걸 다 풀어놓고 아하하 웃고 즐기게 해준 3막. 하나의 형식 안에 가둔 여성이라는 몸과 남성이라는 몸의 절대적인 차이와 그 즐거움이라니. 역시나 춤추는 몸은 늘 옳다.
우연인지 악연인지…
심포니 스페이스를 갈 때마다 거의 확실하다 싶은 확률로 비가 내린다. 그것도 주륵주륵. 다섯번째인데, 그 중 네 번이 비였고 그나마 나머지 한 번도 들어갈 땐 안 내리던 비가 나올 때는 퍼붓고 있었다. 물론 오늘도 비다. 그래도 트와일라 사프라고 끙차 기어나가는 건 장한데, 봄철 알러지 때문에 스스로 주변에 민폐가 될 거라는 두려움에 떨고있다. 그지같은 봄날의 끝은 45도의 날씨에 짱짱하게 얼려주는 쿨러렷다.
고민…
패트릭 스튜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연기를 바로 눈 앞에서 본다면야 그의 듣기좋은 잔잔한 목소리를 침 맞아 가며 다 즐길 수 있겠지만 실제로 천석이 넘는 극장에서는 맨 앞자리도 맨 뒷자리만큼이나 괴롭다. 하지만… 하비 극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이곳이라면 단연 앞자리 불사. 문제는 역시 패트릭 스튜어트다. 런던에서 이 양반이 바로 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런던의 짧은 일정 가운데 이 양반의 맥베스를 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미 이 양반의 약한 발성에 학을 뗀 적이 있다. 해롤드 핀터의 The Caretaker 에서 이 양반이 바로 그 ‘늙고 더러운’ 노숙자 영감이었다. 어찌나 실망을 절절하게 했는지 노인네에게 박수 쳐줄 기운이 남질 않았었다. 그런데 맥배스라… 그것도 리미티드 공연이다. 함께 온 배우둘은 RSC 배우들이다. 지난번처럼… 다른 공연자들을 믿고 봐야 하나. 문제는 이거 또 패트릭 영감 나온다고들 아주 환장을 하며 달겨들어서 이렇게 고민하다가 표가… 표가 사라진 뒤에는 후회해도 늦는다는 웃긴 사실. 아니 … 뭐랄까… 봐야지. 가끔… 런던에서라면 열외가 될 작품이 뉴욕에 와서 봉이 되는 꼴을 보는데, 이것도 그렇다. 뱀은… RSC 의 뒷구녕으로 정녕 전락하기로 결심했냐? 가지고 와도… 너무 돈 되는 걸로만 가져오려고 하는 그 속셈이 너무 빤히 보여. 게다가 RSC 도 기획 자체를 돈되는 기획으로 잡는다. 원래 안그랬다고는 말 못해도… 요즘은 뱀과 함께 너무 짜고 치는 고스톱에 판돈 거드는 찜찜한 기분 어쩔 수가 없다.
사진은 뉴욕 타임즈, The Caretaker
흠… 20분 전? 장난하냐?
New Off Broadway Discounts
The Off-Broadway Brainstormers, a group of theater professionals who have been meeting for the last year, have announced that from March 4 to 11, any tickets remaining 20 minutes before curtain time at 27 participating Off Broadway shows will be available for $20.
Among the participating attractions are “Jewtopia,” “Gutenberg! The Musical!” and “The Voysey Inheritance.” A complete list is on offbroadway.com.
작품 리스트 : 때려쳐! 다 본 거잖아! 라고나… 아, 빈정 팍 상해. 아니지, 본다 본다 하고 안 본 판타스틱스나 이 김에… 허이구. 나참. 그러고 보면 아무도 모르는 프리뷰 이틀째 날 두 명 출연하고 한 명 피아노 치는 구텐베르그를 관객 스무명과 함께 앉아 배꼽을 잡으며 봤구나. 요즘 공연 보는 게 좀 뜸했는데 그래… 보는 게 남는 거다. 보자.
Participating 20at20 Shows
역시나 무대는 배우의 것
늘 안젤라 랜즈베리는 ‘아담 사이즈’ 배우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의 동그란 얼굴과 동그란 눈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시카의 추리극장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이 아줌마를 처음 본 건 나로서는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다.
언제냐 하면 진짜 어렸을 때 삼촌과 함께 극장에 가서 이 삼손과 데릴라를 봤거든. 그 때 데릴라 역에는 어딘지 비비안 리를 연상케 하는 배우가, 삼손 역에는 썰어 열 두 접시 입술이 너무 부담스러운 사극 전문배우(내 멋대로) 빅터 매춰(이름부터 마쵸셔!!) 였는데, 안젤라 렌즈베리는 그 삼손의 정실부인(?) 역이었다. 짧게 나왔지만 꽤 비극적이었고, 삼손이 데릴라를 가볍게 콧웃음을 쳐 넘길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답고 지고지순하고… 뭐 그런 역이었는데, 동그란 눈과 전혀 미녀라고 볼 수 없는 얼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쨋든 기억의 심연 너머로 가라앉아 있던 이 아줌마에 대한 기억을 다시 소환한 것이 제시카의 추리극장과 날으는 침대(?) 뭐 그런 뮤지컬 영화였다. 여기서 안젤라 아줌마는 이미 할머니 분위기였고 눈빛이 대체 마녀일 수가 없지만 어쨋든 착한 마녀 아줌마로 애들 세 마리(두 마리?)와 툭하면 삐지는 아저씨 한 마리를 침대에 태우고 웬 모험을 떠나는 황당 스토리. 서양 동화에 워낙 침대 타고 날르는 종류가 많은데 그 계보를 잇는 작품 가운데서는 꽤 명작작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결국 나는 이 아줌마를 경배하게 되었는데, 바로 스위니 토트의 러벳 부인 역 때문이다. 그 온갖 욕망의 진창에서 이 아줌마는 스위니 토드에 품위를 부여했다. 이 아줌마가 하면 뭐든지 다 용서가 됐다. 사람 잡아 파이 만들고 짝사랑한 사내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마누라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심지어 미친 마누라가 매일 파이집 근처를 배회하고 있음에도!) 살인한 남자를 으깨 파이를 만들면서도 그 남자의 하인에게는 또 상냥하게 대해주는… 대체 이런 복잡한 인물을 어떻게 … 이토록 유머러스하고 다정하게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안젤라 아줌마가 아니고서는! 어쨋든 브로드웨이의 보배와도 같은 이 아줌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빈다. 바로 옆에서 뵈니, 어찌나 키도 크시고 그 연세에 팔등신이시던지, 젊은 시절 ‘예쁘기만 하고 특징이 없는 배우’였다는 사실이 비로소 이해됐다. 딴 건 몰라도… 몸매 하나는 발군이셨을 듯. 게다가 그 쭉 편 허리… 긴 목… 사람 잡더군.
그 옆에서 안젤라 렌즈베리에게 감사의 입맞춤을 건네는 분은 조지 헌. 스위티 토드의 그 분이다. 살도 많이 빠지고 얼굴도 많이 늙으셨지만 스위니 토드의 그림자 따위는 찾아 볼 수도 없을만치 유머러스하고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고 계셨다. 그리고 그 목소리! 아아… 그 목소리… 는 정말 변하지 않으셨음. 사랑해요, 두 분.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조지 헌 아저씨가 어깨에 손을 둘러주신 그 코트는 앞으로 빨지도 드라이 하지도 말까보다. ㅋㅋㅋ
보더빌은 살아있다

로켓쇼를 보면서 나름 감동을 받은 게 있다. 보더빌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 뭐랄까, 전통적인 순서랄까. 로켓쇼는 많게는 하루 다섯 번, 적게는 하루 세 번을 공연한다. 그러려면 손님 빨리 쫓아내고, 하이라이트는 서두에 둬야 한다. 오래 전의 보더빌이 바로 그랬다. 그리고 이 작품도 그렇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 유치뽕짝 뻔할 뻔자 쇼에 75년간 끌어들이고 있는가. 바로 그 뻔할 뻔자 때문이다. 그렇다. 스포츠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 보더빌도 살아있다. 벌레스크도 살아있다. 쇼는 죽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된 전통이 오늘에도 남아있는 걸 보면 묘하게 가슴이 설렌다. 내용이야 어쨋든 말이지.
KNUA Dance company in NY
해롤드 프린스는 ‘이유 없는 춤은 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참 독특한 연출가다. 제작자 출신으로 연출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제작자로서의 흥행 마인드를 놓치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늘 공부했고, 자신의 내면에서는 뭔가가 모자르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가 자신에게 모라자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과거의 무엇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다. 늘 옳다. 우리는 늘 새로운 트렌드가 무엇인가에 집착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은 과거에 깊이 천착해 있다. 어쨋든 해롤드 프린스가 ‘이유 없는 춤은 추지 않는다’는 말을 뮤지컬 무대를 가리켜 한 말이었지만 그걸 춤으로 뒤집어 보면 춤의 무대에서는 ‘이유 없는 걸음은 걷지 않는다’ 가 아닐까. 그렇다. 댄서는 무대 위에서… ‘그저’ 걸으면 안된다. 댄서는 한 순간도 무대 위에서 시간을 그저 때워서는 안된다. 그건, 직무유기죄에 해당된다. 그렇게 댄서를 한 순간이라도 버려두는 안무가가 먼저 죄값을 치러야 하지만.
이번이 두 번째라는 한예종의 KNUA 댄스 컴퍼니의 공연을 보았다. 첫번째는 한국무용이었는데, 이거 보면서 아주 기가 질려버렸다. 나는 춤 자체를 잘 모른다. 그러니까 별로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다. 내가 아는 건, 한국 춤에서 여자의 춤은 근본적으로 기생춤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물론 아니지만, 과거에, 그것도 그닥 멀지 않은 과거에 ‘가인’은 몸 파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우리나라 만의 일이 아니다. 가부키만 해도 여자의 출연을 금지시킨 이유가 여자가 무대에 오르면 사내들은 그녀들을 품으려고 닥달을 했고, 결국 돈은 거기서 벌렸기 때문이다. 풍기문란. 하지만 가부키가 남창으로서의 역할을 새로 담당하게 될 줄이야, 그걸 막은 쇼군께서는 짐작을 하셨거나 말거나. 어쨋건 무대에 서는 자는 자신의 ‘몸’을 내보이는 자다. 그 시절에 몸을 내보인다는 것은 이미 그 몸은 ‘주는’ 몸이라는 뜻이다. 왜 보여 ‘준다’고 하는가. 예수님 지적대로 생각만 해도 간음이라는 식의 몽상적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다. 존재하는 물적 존재로서의 ‘몸’이 눈 앞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은 천한 일이었다. 무대에 서는 몸은 보는 모든 사람들의 ‘소유’다. 그게, 지금에 와서는 티켓 사서 공연 보고 팬클럽에 가입하는 수동적인 행위라면, 그 당시에는 그 ‘가인’은 가질 수 있는 존재였다. 당연히 ‘가인’의 가치는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데 달려 있었다. 하지만, 작금에 와서, 작금에 와서도 마당이나 안방이나 폭포 가의 정자가 아닌 조명기 달린 무대에 서서 젊은 댄서들이 날 잡아 잡숴 춤을 추는 걸 보는 건 아연하다. 이 공연의 첫 춤이 바로 그랬다. 아니, 그게 춤의 의도였다면, 대단히 성공하신 게 맞다. 춤사위보다 먼저 눈꼬리 살살 내리며 눈웃음 치는 훈련 먼저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단했다. 무슨 춤에 그렇게 색기가 좔좔 흘러내리는지… 폴 테일러의 Esplanade를 연상케 하는 댄서들의 등퇴장은 가끔 손 끊긴 강강수월레처럼 보이기까지. 나쁘다 좋다를 떠나, 춤이 사람을 ‘홀리는’ 것은 정말 홀림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침 흐르는 좋은 반응이지만 그 홀림이 50년 전의 것이라면, 아주 생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게다가 비록 내가 50년 전에 태어났어도 저 홀림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님에야. 왜.. 왜… 왜…!! 라는 질문으로 가득찼던 첫번째 레파토리. 게다가 결코 그게 섹시한 것은 아니었다. 섹시한 게 좋냐, 라는 질문은 일단 뒤로 빼고.
두번째, 세번째는 … 마리우스 쁘띠빠와 발란신이었는데, 쁘띠빠는 그렇다 치고, 발란신이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만 가득 들었다. 독무 추는 댄서가 착지할 때마다 내가 다 걱정되더라는 말만 해두자.
네번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음악의 흐름과 몸의 흐름이 맞지 않았다. 이건 결코 음악의 박자와 몸의 박자가 맞지 않았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음악과 몸이 다른 연주를 하는 걸 보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없다. 하지만 때로는 몸이 음악을 배신하기도 하도 때로는 음악이 몸을 배신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배신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직무유기였다. 이 안에는 몇 가지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데, 특히 꼭 따지자면 두 번째 에피소드(였던 것 같다)에서 음악은(아니, 소리는) 극적일 정도로 뚝뚝 끊으며 긴장을 유발하는데, 댄서들은 설렁 설렁 걷는다. 그 순간 잠시… 분노를 느꼈다. 음악이 멈추면 댄서도 멈춘다는 건 우습다. 하지만 그 순간에 아무 긴장도 없이 ‘걷는다’는 건 일종의 배신이다. 그리고 무수한 하얀 공을 들고 노는 장면. 아이디어는 참 예뻤지만 예쁘기만 하고 끝났다. 그 많은 공들이 어떤 리엑션도 유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이 움직임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그저 살짝 부담스러운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메렝게나 한 판 질펀하게 한 번 추었으면 싶은 그런 흥겨운 음악에서도 댄서들이 줄창 ‘모던!’만 외쳤던 것도 지루. 정말 보기 좋았던 것은 달마시안 같은 젊은 댄서들의 힘이 남아도는 몸이었다. 가끔 한국의 ‘모던 댄스’를 보면서 갑갑하게 느끼는 건 모던을 낯선 움직임으로만 해석하려 드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짐작 때문이다. 불 위의 오징어처럼 뒤틀리는 동작들을 빠르게 나열하기보다는 음악 자체에 좀 느긋하게 귀를 기울이는 게 어떨까 하는 안타까움. 좀 더 넉넉하게 받아들이면 어떨까 하는. 내가 만약 스물이거나 혹은 스물 다섯 근처라면 이 춤을 보면서 댄서들의 테크닉이 모자란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어제 본 건 남아도는 힘이었다. 안무가 이들의 남아도는 힘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이들은 팔팔했다. 근육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해서는 당장이라도 날듯이 뛰어나갈 듯한 달마시안들이었다. 달마시안은 사냥개다. 하루라도 전력으로 달려주지 않으면 근육에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 죽는 개가 달마시안이다. 이들이 그랬다. 하지만 어제의 춤은 이들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원만 그리며 달리게 했다. 좋은 음악에 힘이 남아도는 몸이 있었는데도 그랬다는 건 안타깝다. 단지, 조금 안타까웠다는 것이지, 사실 전체적으로는 흐뭇할 정도로 좋았다. 그저… 조금 더, 조금 더 바라는 것 뿐이다. 달마시안, 달려!
가장 개판은 조명이었는데, 시간 문제였는지 셋팅에 실패한 듯 했다. 댄서들이 조명 너머로 사라지는 걸 1시간 반 동안 봐봐. 조명 다 뿌개고 싶지. 의상… 마지막 작품만 빼고, 어쩌면 그리 소재가 초지일관 하신지… 그것도 일종의 컨셉이라면야, 뭐.
Twyla Tharp
브로드웨이 연출가가 아닌 안무가로서 나는 싸프 여사를 무척 좋아한다. 물론 그의 안무를 너무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춤이 지극히 미국적이라서 좋다. 그는 미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댄서들의 힘을 최대한 끌어낸다. 음악의 박자보다 반 박자, 때로는 놀랍게도 엇박자로 움직이는 댄서들의 움직임은 어쨋든 짜릿한 쾌감이 있다. 특히 그가 스윙을 배경으로 작업할 때 그런데, 그것은 진실로 재즈의 정신과 맞아 떨어지는 ‘백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임프로비제이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치 거쉰과 빌 에반스가 딱 떨어지는 백인 재즈 오케스트라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늘 그렇지만 거쉰과 빌 에반스의 음악들은 오케스트라나 빌 에반즈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는 오로지 트럼펫 하나, 둥가둥가 베이스 하나 곁들인 기타 연주, 혹은 좋은 흑인 가수의 목소리가 더 좋지만 말이다. 아니, 재즈는 흑인의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특히 이제 와서는 구별도 안된다. 하지만 전 시대에는 틀림없이 구분이 되었다. 싸프는 그 구분이 모호해지는 시대인 60년대부터 안무를 시작했다. 클래식한 발레에서 모던 발레로, 스윙으로, 재즈로 그리고 다시 모든 걸 합치는 시대를 거쳐오는 그의 안무는 나름의 미국식의 클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밀로스 포먼 감독과 작업했던 세 개의 영화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백야’도 그렇고 단 네 개의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움직임들은 영화 필름에 철썩 달라붙어 배우와 소리와 스텝이 하나로 일사불란하에 움직이는, 뭐 하나도 빠지지 않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헤어가 시작될 때의 그 웅장한 ‘Aquaris’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한 장면 맡을 땐 꽤 하던 이 아줌마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오면 갑자기 팍 신파로 추락을 한다. 이미 전작인 Movin’ out에서 그 전조는 충분히 발견되었다. 이 때 이 아줌마는 시카고 공연의 악평을 계기로 쇼 닥터를 초빙하여 자신의 ‘모던함’을 다 묻어버리는 신파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고역을 치렀다. 그건 틀림없는 굴욕이었지만 결과는 달콤했다. 아줌마는 안무상을 거머쥐었다. 토니상이라는 이 지극히 상업적인 상은 아줌마에게 늦은 나이에 새로운 유혹으로의 초대였고 아줌마는 덥썩 미끼를 물었다. 문제는… 밥 딜런이라는 데 있었다. 사실 나는 밥 딜런과 사프는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밥 딜런의 그 리듬감 있는 웅얼거림, 록이면 록, 포크면 포크, 심지어 블루스까지 뭘 불러도 이 아저씨의 노래는 이 아저씨만의 것이다. 누가 리메이크를 해도 이 아저씨가 부른 원곡을 따라가는 걸 아직 본 적이 없다. 문제는 이 아저씨가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가사도 다 쓰다 보니… 게다가 대부분의 곡들이 왜 썼나, 왜 불렀나, 그걸 부를 때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정황들이 하도 톱니바퀴처럼 딱 맞아 떨어져서 이게 다른 정황에 놓이면 너무 어색하다. 이를테면 이 작품에서 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저씨의 노래 ‘Knocking on heven’s door’는 베트남전에 끌려가기 싫은 사내가 부르는 지옥 가기 싫어요,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이 뮤지컬 안에서는 세 명의 주요인물 가운데 하나인 Ahrab이 죽으면서 부르는 노래. 이건 완전히 찬송가였다. 천국이 날 부르네, 얼굴도 못 본 엄마, 날 받아줘요, 풍이었다. 아, 죽어가면서 부르는 노래… 맞다. 하지만… 이 아저씨 공연에서 온갖 치사한 짓은 혼자 다 하는 비열한 캐릭터여서 이 자가 죽고 난 뒤 갑자기 축제 분위기가 되게 만든 분이다. 그런데… 이 비장의 무기를 이 아저씨가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모든 게 이런 식이다. 문제는 명확하다. 싸프 여사는 전작의 굴욕에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으셨다. 그래서 밥 딜런의 노래를 모아 이야기를 엮어 보려 하셨지만 그게 엘튼 존이고 빌리 조엘이고 비치 보이즈면 몰라도 밥 딜런은 애당초 글렀다. 밥 딜런은 곡 하나 하나가 최소한 하나의 중, 단편 소설은 되니 말이다. 가사를 바꾸면 더 개판이 될 거고. 하지만 아줌마가 이 작품의 배경으로 막 굴러가는 서커스단을 설정하고 광대들이 단장을 ‘다구리’ 해서 죽이는 설정은 짜릿할 정도로 좋았다. 아니, 이런 막가는 어두운 얘기, 브로드웨이에서 언제 보겠나. 자식새끼가 애비 죽고 새로운 단장이 되어 애비의 여자를 끌어안고 새 시대를 열어간다는 이 정말 막가는 스토리…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토리를… 모두 머릿속으로만 그려야 한다는 게 너무 슬프다. 아무 이유가 없다. 아무런…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다. 스물 다섯 곡이 불리워지는 동안… 그 모든 장면이 따로 놀고, 어느 관객도 이 스물 다섯개의 장면을 이어 맞추질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프 여사가 하고 싶은 말, 보고여주고 싶은 춤… 그런 게 왔다. 이 작품은 춤으로도 노래로도 어정쩡했다. 차라리 그녀의 장기인 찡하게 추는 장면이라도 많았으면 춤이라도 환호를 받았을텐데 세 명은 노래하고 일곱명은 춤을 추다 보니 노래 할 땐 뒤에서 춤 추기 뻘쭘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야, 사실 뻘쭘할 일도 아닌데, 싸프 아줌마가 평소 자기 안무하던 빨로 그냥 밀어붙였으면 괜찮았겠지만 이 아줌마 ‘왜?’ 를 떠올리기 시작하니 그게 안되는 거다. 그러니 배우들은 춤을 추다 말고, 가수들은… 하하… 그 개같은 여배우… 정말 때려 죽이고 싶더라. 그나마 Ahrab 이나 Coyote는 나름 자기 주관을 가지고 부르는데, 이 멍청한 여배우는… 노래 다 말아 먹고… 나중에 훌라푸흐 걸고 나와 ‘Showtime!’을 외칠 땐, 너만 들어가면 그래도 참고 보겠다! 라는 외침이 절로 터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 여기 저기서 그녀가 나올 때마다 중반 이후에는 끙! 하는 신음소리가 들리더라니까. 나중에 박수 받는데 정말 웬만하면 박수 쳐줄텐데 박수를 앙상블보다 덜 받았지만 그래도 싸다. 미스 캐스팅도 이런 미스 캐스팅은 처음 본다.
싸프 아줌마. 시카고 휴버트 스트릿 댄스 시절로 돌아오세요. 바람 부는 도시에서 총알과 바람을 뚫고 강하게 댄서들을 키우신 당신이 뉴욕 와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까짓 아줌마 머리로는 도저히 완성이 안되는 ‘드라마’는 버리고 당신 잘하는 그 ‘춤’을 추세요. 그 많은 안무가 출신 연출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브로드웨이의 가장 중요한 쇼비지니스의 연출가 쪽 맥이긴 하지만 아줌마는 아니에요. 아줌마의 마인드는 무서울 정도로 언더에요. 그래서 아줌마가 좋고, 그래서 브로드웨이에서는 안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아줌마가 너무 좋아요. 아줌마가 얼마나 승질이 더럽고 독재자에 개떡같이 캐스트 턱턱 짤라대고 스텝 갈아치운다 해도 내 알 바 아니지. 그냥… 아줌마가 밥 딜런 노래로 정말 춤으로 다시 한 번 승부 거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될 법한 일이 아닐테지만, 어쨋거나, 아줌마 달려!
How many of you know what you want?
일인극 Stanley
Stanley를 보고 왔다. 스탠리, 연극사에 길이 남을 이 유명한 캐릭터, 야수와 같은, 말론 브란도에 의해 완벽하게 육신을 얻은 존재, 작가인 테네시 윌리암스의 의도마저 훌쩍 뛰어넘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오직 단 하나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이 캐릭터를 감히 가지고 논 귀여운 배우가 있으시다. 작품의 가치로서, 완성도를 따지자면 이 작품은 별 다섯개 만점에 별 두 개짜리다. 그나마도 꽤 괜찮은 프로젝션 아이디어와 무대 덕분이다. 배우는 발성도 안되고 몸도 덜 풀린데다 눈빛도 희멀겋다. 왜냐하면 그는 간밤에 음주가 심하셨거든. 배우의 숨결이 객석 전체로 전해지는 그 조그만 극장에서 일인극을 공연하면서 간밤에 마신 술이 덜 깨 무대에 서는 배우는 매장당해 마땅하다. 물론 그는 술이 깼다. 정신은 멀쩡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마신 술은 다음날까지 그 독특한 ‘향기’를 남기지 않나. 보드카를 너무 드셨던 모양이지. 하지만 묘하게도… 스탠리라는 인물과 술냄새가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을 수가 있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외쳤듯이 ‘난 짐승이 아냐!’ 라는 그 말, 그에게서 풍기는 덜 가신 술 향기(웩)와 춤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은 그를 ‘짐승’으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말론 브란도, 그 섹시함의 드럼통에서 건져내신 몸이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기에, 이 술 덜 깬 배우는 그야말로 멍청한 짐승의 자리로 추락한다. 하지만 그 자신도 안다. 하여, 그는 자기 자신을 쓰레기 더미에 던져 쓰레기 가운데 핀 꽃인양 꾸민다. 하지만… 여전히 좋지 않은 발성은… 짜증난다. 더하여 말론 브란도의 흉내를 내는 모습은 상한 시금치를 먹은 뽀빠이마냥 부조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무대에서 나는 심하게 상했다. 그는 홀로 무대에 서서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아니, 그는 다정하게 노크해 줄 그런 배우가 아니다. 그는 무식한 짐승. 그러므로 그는 핏줄이 불끈 드러난 그 주먹으로 관객의 가슴을 친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오직 단 한 줄의 대사로 그는 그 쉽지 않은 짓을 해낸다. 그는 관객에게 묻는다. 매번 다른 표정으로, 매번 다른 억양으로, 매번 다른 감정으로 그러나 물을 때마다 내 가슴은 칼로 베인 듯 날카롭게 자상을 입는다. How many of you out there know what you want? 그리고 이어서 또 묻는다. How many of you are hungry but don’t know what you want to eat? 그렇다. 나는, 지금, 심하게 굶주려 있다. 그의 질문에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차라리 모르고 싶을 정도로 심하게 잘 안다. 하여, 나는 굶주려 있다. 내 얼굴이 너무 심각했나보다. 이런 후진 공연이 나에게 정면으로 들이대다니, 빌어먹을! 나는 세번째 줄 한가운데 섬처럼, 오직 한 명 뿐인 동양인 여자로 앉아 있었기에 그는 공연 내내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소극장에서 세번째 줄에 앉을 때는 배우와의 대면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관객으로서 배우를 동경한 적이 없는 나는 단 한 번도 배우와의 대면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는 나를 가리키며 liar!라고 외쳤다. 물론 오직 나만을 가리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손 들지 않은 사람들 하나 하나를 가리켜 외쳤다. 그 때 그의 질문은 How many of you lost everything ever you want? 였다. 나는 거의 손을 들 뻔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하여, 나는 손을 들지 않았고 그가 오른팔을 쭉 뻗어 검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liar!하고 외칠 때 고개를 끄덕이며 yes, you are. 하고 응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웃었고 그도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웃었다.
대본은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커다란 덩어리를 삼키지 못한 채 작고 음향 형편없는 극장을 떠났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배우라도 무대 위에 서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는 무한한 힘을 지닌다. 오늘의 그 배우가 그랬다.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를 형편없는 발성과 성대모사도 제대로 못하는 배우. 그러나 그는 내게 물었다. Do you know what you want? 하고. I know what I want is that what I have not to want. 하고 나는 대답했다. 마음 속으로만. 그랬다. 나는 내가 바래서는 안되는 것을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 공연에서, 이 형편없는 공연에서 내 자신과 대면했다. 나의 이기. 나의 자존감. 나의 존재. 이 공연을 나는 그러므로 결코 잊지 않을테다. 질문을 던지려면, 직구로, 스트라이크로 던지라. 할 말이 있을 때는 두 눈을 똑바로 보며 제대로 칼을 꽂아라. 비록 상처를 입을지라도 그러는 그대를 미워하지는 못하리라. 공연에서 스탠리가 외쳤던 그 대사를 조금 바꾸면 바로 내 심정. 하지만 누구에게 추천하기에는 공연 자체가 지나치게 수준미달이다. 상가집 가서 지 슬픔으로 겨워 우는 여편네가 바로 이 공연을 보던 나였다. It turned my mind absolutely upside down. … It was fantastic!
사족이지만 욕망기차 안의 두 자매, 별소녀 스텔라, 순수소녀 블랑쉬…아아… 테네시 윌리암스의 작명센스는 정말… 미치겠다 진짜.
The Lieutenant of Inishmore
@ Lyceum Theater
영국 출신 극작가 마틴 맥도너는 젊다. 그가 스물 여덟의 나이로 <리네인의 미의 여왕>(Beauty Queen of Leenane, 1998)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을 때 이미 그는 영국의 가장 촉망맏는 젊은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영국 연출가 게리 하인즈는 영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토니상 연출상을 받았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자리잡은 드루이드 극장에서 처음 공연한 1996년 1월 이후 바로 런던의 웨스트 엔드로 옮겨갔고 2년 후에는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인 아틀란틱 극장에서 공연되었으며 바로 석 달 후에는 브로드웨이로 올라가는 등 빠른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그의 작품은 롱런하지는 못해도 나름대로의 팬층을 형성하면서 불과 7년 사이에 네 개의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올라오면서 주요한 작가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최근 그와 함께 영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또래의 <마켓 보이>(Market Boy)의 작가 데이빗 엘드리지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데이빗 엘드리지가 마치 미국 작가들처럼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갈수록 깊이 천착해 들어간다면 마틴 맥도너의 작품은 처음에는 아일랜드의 오지에서 시작하여 닫힌 사회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분노가 어떻게 작은 마을 안에 갇혀 개개인을 향해 칼처럼 날아가는가를 보여 주었다면 나중에는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쪽으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그의 세 번째 브로드웨이 상연작이었던 <필로우맨>(Pillowman)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브로드웨이 상연작인 <이니시모어의 중위>는 쓰여진 순서로는 <필로우맨>보다 앞쪽이면서 그의 작품의 변화를 감지하게 해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데뷔작인 <리네인의 미의 여왕> 은 두 모녀의 애증을 다룬 작품이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돌보는 바람에 혼기를 놓친 사십 줄에 들어선 딸의 서로를 못 죽여 안달하다 결국 딸이 어머니를 죽이는데 성공(!)하는 내용으로 이 작품 어디에서도 모녀지간의 애틋함은 털 끝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초장부터 거대한 덩치의 어머니는 장을 보고 들어선 딸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온갖 잔소리는 물론 딸의 동정을 자아내기 위한 꾀병까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는 비열한 노인네고, 그 노인을 대하는 딸은 물을 마시려고 집어든 컵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만큼 자신의 친 어머니를 증오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들이 왜 그렇게나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참 어지러웠던 시절의 아일랜드의 현실과 맞물려 돌아간다.
영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IRA를 결성해 무장 항거를 시작했지만 덕분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출구 없는 암흑같은 삶으로 빠져들어갔다. 사내들은 무기를 들고 집을 나갔고 여자건 남자건 살아남는 게 일단 급선무였다. 아일랜드라는 척박한 땅에서도 또 전기마저 까막까막 들어왔다 말았다 하는 믿을 수 없을만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도 이들 모녀는 그들의 생계수단인 주막, 그것도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하루에 두셋 뿐인 말 뿐인 곳에 갇히다시피 하여 서로의 분노를 서로에게 쏘아대는 것 말고는 남지 않은 인물들이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이 오면 관객들은 이런 결말마저 이 작은 마을에서는 그닥 낯선 일이 아님도 깨닫게 된다.

.사람보다 귀한 고양이 목숨?
주인공인 페드레익은 ‘자칭’ 이니시모어의 중위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아버지인 도니조차 어쩌지 못한 개망나니였지만 그의 아버지 역시 아내를 두들겨 패던 망나니였었다. 페드레익은 자신의 불행을 전적으로 자신을 잘못 키운 부모에게로 돌리지만 어머니를 가끔 두들겨 팼던 아버지 도니는 차라리 인간적인 인물이다. 사건의 발단은 도니의 주막 일을 가끔 거드는 소심한 동네 청년 다베이가 동생의 분홍 자전거로 그 무서운 페드레익이 애지중지 하는 고양이를 치어 죽이는 엄청난(?) 사건 때문에 시작된다.
소심한 다베이는 이 일을 절대 페드레익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도니에게 사정사정 하지만 도니 역시 이 일이 아들에게 발각되었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두렵기는 마찬가지. 결국 아들에게 전화해서 고양이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만을 전한다. 그 때 페드레익은 제임스라는 마약상을 거꾸로 매달고 고문하는 일에 바쁜 중이었다. 청소년에게 마약을 판다는 이유로 제임스를 고문하는 페드레익은 첫 등장으로 이미 관객에게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내 보인다. 청소년에게 마약을 파는 제임스는 물론 악당이지만 자신이 직접 심판자이자 집행자의 역할까지 자처하지만 누구도 그 권한을 부여해 준 적이 없는 페드레익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피를 흘리는데도, 그 입에서 나오는 시니컬하면서도 앞 뒤가 안 맞는 멍청한 대사들 때문에 관객은 웃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은 패드레익 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똑같다.

이를테면 페드레익이 고양이의 상태를 보기 위해 돌아온다는 소식에 놀란 다베이가 여동생의 고양이를 물들이기 위해 구두약을 발라대는 장면에서 이 작전이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오로지 무대 위의 다베이와 도니 두 사람 뿐이다. 페드레익이 돌아온다는 소문은 빨리도 돌아 조직 안에서도 골칫덩어리인 그를 없애기 위해 동네 깡패같은 존재인 IRA의 떨거지같은 세 명이 모인다. 사실 페드레익 역시 IRA에 가입하기를 원했지만 대체 이념이라고는 없이 잔인하기만 한 인물을 받아들여주는 조직이 있을 턱이 없기에 쫓겨난 뒤 자칭 혼자만의 잔인한 처벌을 하고 다니던 중이었고 그런 행각은 조직의 입장에서는 환장하고도 남을 정로도 어이없는 살륙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동네 청년인 다베이를 묶어놓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던 페드레익은 이번에는 주막으로 쳐들어온 이 세 깡패로부터 죽임을 당할 처지가 되지만 웬걸, 분홍 자전거의 주인인 다베이의 여동생 메어리드의 출현으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깡패 세 명은 관객의 눈 앞에서 페드레익의 손으로 사살된다. 한 명 한 명이 총을 맞고 죽을 때마다 정교하게 계산된 피가 뿜어져 나오고 배우는 피투성이가 되어 픽 픽 쓰러진다.
작품 말미에서 관객들은 주인공인 페드레익보다 한 술 더 뜨는 그의 여자친구 메어리드의 실체에 경악하게 된다. 메어리드는 페드레익과 함께 그의 아버지와 자신의 오빠를 처단하고 동네를 떠날 계획이었지만 화장실에서 구두약을 뒤집어쓴 고양이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그걸 죽인 사람이 바로 페드레익이란 사실을 알자 서슴없이 페드레익의 머리에 총을 쏜다. 나이가 어릴수록 잔인함이 더욱 극에 달하는데, 그만치 죽음에 무감하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극은 허망해지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머레이드가 떠난 후 악몽같은 날이 밝아오는데, 죽은 줄 알았던 패드레익의 고양이가 돌아와서는 밥을 달라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힌 도니와 다베이는 자신들이 당한 수모가 다 그 고양이 탓이라며 바닥에 흩어진 총을 집어 고양이를 겨누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평범한 인간에 대한 진실이다. 고양이 한 마리 쏘지 못하는..피, 너무 많아서 놀랍지도 않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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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d’Arcy James (left), Andrew Connolly and Dashiell Eaves |
이 작품은 시작부터 피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내내 관객들은 웃어야만 하는 기가 막힌 딜레마에 시달린다. 무대에서 피를 보는 것은 사실 그닥 달갑지 않은 일이다. 봐도 별로 무섭지가 않기 때문이다. 호러 장르는 영화에서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무대에서는 그닥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무대 기술이 발달함과 동시에 소품도 발달해 왔고 피 역시 발달해 왔다. 이를테면 영화에 쓰이는 피보다 좀 더 점도가 높고 색이 짙은 무대용 피는 배우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과 배우의 옷에 묻는 것, 시체에 쓰이는 것 등이 모두 다른 제조법으로 만들어진다. 이 작품에서 피는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쓰이지 않는다. 극도로 비현실적인 죽음 앞에서, 즉, 코미디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을 더욱 더 강조하는 소품으로서 쓰이며 넘치는 피와 넘치는 코미디로 ‘죽음’과 ‘살인’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되묻고 있다.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단지 고양이 하나 뿐이라면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순식간에 무시될 수도 있지 않나며 뻔뻔한 얼굴로 되묻는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 무대에 선 배우들의 역량에 조금 문제가 있다. 200석짜리 아틀란틱 극장에서 할 때는 무리가 없었지만 천석이 넘는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자 이들의 연기는 지나치게 위축되었다. 섬세한 연기를 필요로 하는 소극장 무대와 멀리 있는 관객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대극장 연기는 확실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연극의 경우 마이크의 사용을 뮤지컬에 비해 훨씬 소극적으로 사용하여 배우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에 더 더욱 경험이 적은 배우들에게는 쉽지 않은 공간이다. 페드레익 역의 데이빗 윌못, 깡패 두목 역의 앤드류 커널리 등을 제외하면 배우들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게다가 변환 없는 무대를 억지로 바위산을 끼워넣은 무대 디자인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 프러덕션은 애당초 큰 극장에 어울리는 규모를 지니지 못했기에 롱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틴 맥도너의 팬이라면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열광하며 짧은 공연 기간을 결코 놓치지 않았을 블랙 코미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