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ressing the Czar
윌리엄 포사이드. 명성이야 자자하지만 그의 춤을 직접 무대에서 본 건 이번을 포함해서 세 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은 단연 최고였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그의 움직임. 86년 작품이 이토록 되바라질 수 있고 이토록 잘 정리될 수 있는데 왜 그의 움직임은 갈수록 간결해져가는지… 자취를 더듬어 봐야 되나 싶을 정도.
멍때렸던 인트로 1막, 심장을 꼭 조여서 한 치도 풀어주지 않던 2막, 그리고 모든 걸 다 풀어놓고 아하하 웃고 즐기게 해준 3막. 하나의 형식 안에 가둔 여성이라는 몸과 남성이라는 몸의 절대적인 차이와 그 즐거움이라니. 역시나 춤추는 몸은 늘 옳다.
인간의 존재에 ‘존엄’을 붙일 수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스스로를 비춰 보더라도 다른 인간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다. 믿자, 믿자고 수많은 매체들이 말하는 이유는 결코 믿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뿐이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의 위대함이 그의 위선과 그의 나약함을 밟고 일어서게 해주는 인간도 간혹은 있다는 사실에는 모골이 송연하다. 자세한 리뷰는 시간 날 때 다시. 필립 그라스는 음악 그 스스로가 무대를 연출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이번에 다시 재확인 했으며 사랑스러운 엽기 괴짜 맥더못이 이제 다른 문을 열고 거장의 대열에 편입했음을 확인했다. 
Where were you when I was getting old?
제리 스프링어의 2막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몰아붙이는 대사다. 2막에서 제리가 억지로 떠맡은 토크쇼(0r fucked up ass with barbed wire ㅋㅋ) 아담과 이브도 사과 한 알 따먹었다고 이 지랄이냐며, 애 낳고 아플 때, 자식놈들이 서로 때려 죽일 때, 그 때 당신은 어디 있었느냐고 예수에게 지랄을 해댄다. 그 때마다 예수가 하는 대답은 ‘내 손의 상처를 보고 그런 말을 하냐?’는 항변. 악마는 ‘이 천 년 동안 써먹고도 아직도 지겹지 않냐!’고 지랄.
’내가 고통받을 때 예수님 어디 계셨어요?’ 는 아주 오래된 기독교 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의문이었다. 금관의 예수의 가사를 떠올려 보라. 대체 한국이란 나라에 신의 은총 따위가 있기는 있었나 싶었던 지지리 암울한 시절 동안, 대체 신은 어디서 뭐하고 자빠져 있었더란 말이냐.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아무 의미가 없어졌음을 이 쇼는 보여주고 있다. 즉, 신의 존재유무, 신앙심의 유무가 이미 사람들에게 아무 고뇌도 고통도 주지 않는다. 이 질문에서 마리아의 촛점은 내가 고통받고 있었다는 게 아니다. 마리아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가 늙어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가 어째서 마리아에게 젊음을 돌려주지 않는가. 하다못해 서저리 비용이라도 대줘야지. 물을 포도주로 만들면서 어째서 돌을 금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하는가 말이다. 불과 20년 전 만 해도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었던 존재론… 의미 없음. 에 대한 조롱. 이미 반기독교니 신성 침해니의 개념 따위는 요단강도 사틱스도 다 건넌지 오래인 질문이다. 지금, 오늘 의미있는 질문은,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돈지랄 하며 젊게, 자극받으며 사는 것. 아름답게 ‘보이는 것’ 뿐. 사유가… 의미가 있나? 오늘은 몰라도 내일도? 그저 주워 처먹으며 사는 거 말고… 더? 이 작품을 보고 등골이 서늘한 건… 그래서 나 뿐이 아닐게다. 도덕성의 해이니, 신성모독이니 하는 따위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으니까.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국립극단의 배우들이 ‘연기’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고자 스스로 기획하고 저예산으로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에서 올리고 있는 ‘스튜디오 배우 열전’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첫 작품이 꽤 신선했다는 평이 있었지만 놓쳤고 두 번째 작품이라도 보자고 생각하여 도전했는데 하필 두 번째인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노로그. 크헉! 결론부터 말하면, 술 취한 79학번 선배에게 불려나가 80분간 찌질한 신세타령을 졸지도 못하고 무릎 꿇고 듣고 앉았는 바로 그런 드러운 기분. 대본만 곰곰히 들어보면 무척 재밌을 수도 있는 부분도 있고 관객의 긴장을 완화시킬 부분들이 적절하게 들어있건만 이놈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는 시종일관 진지하셔서 아주 진짓상을 말아드시더만. 고흐는 살아 생전에 찌질한 조울증 환자에 알콜 중독, 못생기고 돈 없는, 여자 밝힘증의, 유명해질 리가 없는,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알 수 없는, 소리만 고래고래 질러대 말썽 대마왕인 그저 그런 환쟁이었다. 그러나 이 배우가 연기하는 고흐는 이미 거장이셔, 거장. 게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무대 디자인. 여기 저기서 모은 ‘그럭저럭’ 모던해 보이는 장치인 천장에서 전구 늘어뜨리기, 바닥에 높이가 다른 원주 늘어놓기, 배경에 세 장의 대형 캔바스 설치하기.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효율적이지 않은데다, 뭔가 채우려는 몸부림 외의 어떤 의미도 없다. 이를테면 전구를 보자. 노란 백열전구 서른 네 개는 고흐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노랑이더냐. 그러면… 키는 시점이나 끄는 시점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더냐. 왜 켜져 있는지 전혀 의미가 없더구만. 게다가 뒤의 캔바스 셋… 나중에 고흐가 그 뒤로 들어가 먹칠을 하는데… 왜 그르슈? 먹칠을 하면서 또 웅얼웅얼… 그게 아주 짜증이었다. 결국 뭔가 퍼포먼스를 하고 싶었던 거야? 또 높이가 다른 원주 열 넷. 그보다는 차라리 고흐의 방에 놓여있던 그 의자 한 개 놓아두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 열 넷의 원주는 키 작은 그 배우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것도 있어서 거기 걸터 앉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아주 짜증날 지경으로 엉망. 게다가 극이 종반에 이르면서는 배우의 힘도 다 해서 아주 그 때부터는 기계적으로 대사를 외우기 시작. 잠을 자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그렇게 굴곡 없이 편지만 읽으시니 본인도 힘드시겠습니다. 굴곡이 없었냐… 아니… 뭐 소리를 지르기고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고함도 지르지만…어므 다 같은 말이네? 라는 그런 말입니다. 암튼 배우에게 마지막 그나마 박수라고 쳐준 것은 80분 분량의 대사 외우느냐 고생 많았다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동행은 아주 식후의 단 잠을 주무시더라. ㅎㅎㅎㅎ 배우도 관객도 행복한 모노로그를 보여주시라, 제발. 서로에게 못할 짓 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나는 고흐가 두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검은 셔츠, 검은 바지를 입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쯤 해둬. 아무리 검정이 배우들의 색이라고 해도… 이미지상으로 무대 전체가 검정이었다. 검정. 마지막의 그림마저도 검정. 대사톤도 검정. 그렇게 다 먹칠을 해버리고 싶다면… 20분간 불을 끄고 관객을 재우지 차라리.
하지만 트러스에 매다는 조명을 최대한 자제하고 색을 사용하기 보다 자연스러운 색감을 이끌어내고 배우의 얼굴에 집중한 조명은 좋았다. 더불어 한국말을 한국말로 끊어내는 배우 김종구의 말하는 법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말하기는 십 분이 지나가 같은 리듬, 같은 높낮이로 시종일관하여 아무 매력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원주 숫자와 전구 숫자를 세고 앉았던 스스로에게 애도를.
귤이 회수를 건너 …
반은 속아서 봤다. RSC라며! 알고봤더니 1999년에 거기서 처음 공연했던 작품이다. 처음에는 워크샵으로 시작했고 나중에는 인트로 성격의 모놀로그가 아닌 완전한 희곡으로 발전하여 공연되었다. 워낙 바닥에 깔린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아서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끌어가는 힘은 넘쳤지만 문제는 프러덕션의 완성도. 특이 무대 디자인과 의상 디자인은 끔찍했다. 그동안 그 극장에서 본 작품 가운데 단연 바닥을 친다. 이건 모두 연출가의 죄라고 본다. 디자이너가 머리가 없어 그 낮은 무대에 지랄맞게 높은 이층 무대를 만들었겠냐고. 그 넓다면 넓은 무대가 좁다고 판단한 연출가의 판단미스. 배우가 2층에 올라가 서면 그 배우와 눈이 맞는 열의 사람은 오로지 같은 2층의 두줄짜리 객석에 앉은 손님들과 그 바로 아래 위치한 콘솔박스에 앉은 오퍼레이터 뿐이다. 지랄이지. 게다가 배우들은 조명을 피해 머리를 움직이여 하고 심지어는 일 미더 앞에서 얼굴을 비추는 조명을 견뎌야만 한다. 누구를 위한 이층이냐. 그리고 의상… 제발 시접이라도 제대로 해라. 오프닝 공연에 낱낱이 풀린 실밥 달고 나오는 의상은 보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 의상, 그래, 스케치는 굉장히 예뻤을 거다. 이해하겠다. 하지만 디자인 잘했다고 일 다 끝난 거 아니거든. 디자인대로 작품이 나와줘야 할 거 아니냐. 누구라도 네가 천 길이 잘못 끊어 한 단 더 단 거 알거 아니냐. 하다못해 바느질이라도 울지 않게 잘 하지 그랬냐. 머리에 웬 부채? 개짜증. 그래도 되도 않는 미국 배우들이 영국식 발음 쓰다 말다 나중에는 다 포기하며 지랄맞게 긴 대사를 세익스피어풍으로 읊게 한 연출가 아줌마… 왜 그러셨어요. 왜! 원작자는 여자, 각색자는 남자, 다시 뉴욕에 와서는 연출가가 여자. 그렇다 보니 이 아줌마 여자 캐릭터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럼 좀 초지일관 하시던가. 무슨 캐릭터가 널을 뛰어. 물론 배우도 못했지만 아줌마 당신 책임이 더 크다. 아무리 봐도… 미국 배우들은… 고전은 집어쳐주세요. 아니… 집어치진 않아도 된다. 잘 하는 거 있잖아. 할 수 있는 한 가볍게, 띄워 주는 거. 얼마나 좋아. 그러니 눈에 힘주고 어깨에 후까시 넣는 건 그만두지… 이젠 좀. 보다보다 부담스럽고 짜증나고 화나고 눈은 피곤하여… 미치는 줄 알았네.
누구 말대로 이 작품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게 결론.
그나저나 영국은 아직도 여전히 노예시대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코람 보이도 이 작품도… 은근히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심지어 이 작가는 나이지리아 출신인데도. 뭔가 잘못되도 너무 많이 잘못되었는데 애당초 단추를 잘못 꿰기 시작한 단추 아흔 아홉개 달린 예복이라도 되는 듯한…
뮤지컬 라이온 킹 : 월간 디자인
디즈니와 줄리 테이머의 만남이 일으킨 뮤지컬 디자인의 혁명
뮤지컬 <라이온 킹> 원문 기사 보기
우리에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익숙한 <라이온 킹>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뮤지컬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엘튼 존의 음악과 드라마도 빼놓을 수 없지만, 동물 캐릭터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해낸 놀라운 솜씨와아프리카 사바나의 정글을 환상적으로 재현한 무대 세트가 압권이다. 단순한 애니메이션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어낸 뮤지컬 <라이온 킹>의 진정한 주인공, 디자인을 만나본다.
뮤지컬 <라이온 킹>의 진정한 주인공, 디자인
<라이온 킹>의 첫 장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150년의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 장면중 하나로 선정될 가치가 있다. 아프리카의 광활한 자연과 동물들이 평온한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훗날 왕이 될 어린 사자 심바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 분위기의 막이 열린다. 이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바로 동물의 표현 방식이다. 기린을 연기하는 배우의 두 팔과 두 다리에 죽마를 연결하여 길이를 표현하고 기린의 목과 머리는 긴 모자처럼 머리에 써서 표현한뒤 묘기를 부리듯 우아하게 걷는 모습은 인간의 관절과 동물 관절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해 예술적으로 양자를 결합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네 사람이 각각하나의 다리를 연기해 크기에 대한 현실감을 부여한 코끼리, 수레바퀴를 이동시켜 회전하며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젤이나 배우가 연처럼 공중에서 돌리는 독수리 장대 등은 동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데 다양한 예술적 표현 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창작진이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라이온 킹>에서 동물 캐릭터를 표현하는 핵심은 얼굴을 드러낸 배우들이 직접 조종하면서 표현하는 동화적인 디자인이다. 이는 일찍이 연출가 줄리 테이머가 일본에서 오자와 세이지가 지휘한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렉스>(1992)의 연출을 맡았을 때 이미 시험해 호평을 받은 적이 있는방식이다. 그전까지 줄리 테이머가 만든 가면은 배우의 얼굴을 가리는 고전적인 형식이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이자 프리 마돈나인 제시 노먼의 얼굴을 이전과 같은 방식의 가면으로 가리는 게 아깝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성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면을 포기하지 않은 줄리 테이머는 배우의 얼굴도 드러내고 가면도 제 역할을 하면서 배우들의 목소리와 표정에 가면이 오버랩되는 것을 원했다. 그 결과 가면을 얼굴에 쓰지 않고 로마군 투구처럼 얹는 방식으로 결정되었고 이는 4년 후 <라이온 킹>에 더욱 발전된 형태로 도입되었다. 따라서 관객들은 무파사, 스카, 심바, 날라 등의 사자 형상의 가면과 실제 배우의 얼굴을 동시에 보면서 동물과 배우로서의 인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고정되어 있는 동물의 표정에 드라마틱한 감정을 불어넣는 것도 배우의 표정 변화로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1 아프리카 사바나의 아침을 표현한 첫 장면. 커다란 태양이 떠오르면 키 큰 기린 두 마리가 태양 앞을 지나고 이어 치타와 가젤 영양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무대 디자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
2 스카와 무파사가 대결하는 장면.
3 스카의 삐딱한 성격을 표현하는 의상 디자인 스케치.
4 위풍당당하게 표현된 무파사의 의상 스케치.
5 차분하고 집단적인 느낌을 주는 암사자 의상.
6 라피키는 얼굴 분장만으로 캐릭터를 표현했으며, 의상을 통해 개코원숭이의 특징과 체형을 명확히 보여준다.
배우와 인형이 합체된 캐릭터
배우의 두 다리를 앞다리로 사용한 얼룩말과 뒷다리로 사용한 치타에서는 얼굴까지 덮는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인형사가 두 팔, 두 다리(혹은 네 다리) 인형을 조종함으로써 배우의 존재를 감추는 일본의 인형극 *분라쿠의 조종기법을 도입했다. 이 경우에도 얼굴은 드러냈다. 이렇게 배우와 인형이 동시에 하나의 캐릭터로 드러나는 방식은 얼굴 위에 가면을 쓴 사자의 표현 방식과 내적으로 동일한 콘셉트로 볼 수 있다. 또한 선악과 진화의 정도에 따라 인형의 외적인 표현 방식도 구분했다. 가령 사자 전체와 그들의 친구 티몬, 코뿔새 자주는 두 발로 걷게 해 직립인간처럼 우월한 권위를 부여한 반면, 하이에나 등 악역은 진화가 덜 된 네 발 달린 동물로 표현하고 있다. 심바의 친구 중 지능이 떨어지는 멧돼지 품바도 자세히 보면 뒷다리가 붙어 있다. 디즈니식의 권선징악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단순화 하는 문제에 대한 디자인적인 화답인 셈이다. 품바, 티몬, 자주, 하이에나의 경우는 여타의 동물이나 사자 캐릭터와는 달리 배우가 매우 짙은 분장을 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극중에서 희극적인 캐릭터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다. 첫장면에서 정글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주술사로서 심바를 왕의 길로 인도하는 개코원숭이 라피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상징하기 위해 원숭이 인형을 부착하지 않은 채 배우의 얼굴 분장으로만 캐릭터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렇듯 <라이온 킹>에는 총 230여 개의 실물 크기 인형과 그림자 인형 등이 출연한다. 가면은 종이나 점토로 만든 성형 위에 실리콘을 분사한 뒤 고무막이 형성되면 그것을 벗겨내고 마지막에 탄산 흑연을 사용해 제작한다. 만약 나무를 가면 재료로 사용한다면 배우의 연기에 지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무겁기 때문에 탄산 흑연을 재료로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1 무파사나 스카와는 달라야 하는 심바의 가면은 로마군 투구처럼 턱 부분이 없는 형태로 디자인했다.
2 10대가 된 심바의 의상 스케치.
3 줄리 테이머의 치타 스케치. 배우가 어떻게 인형과 한몸으로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4 인형 조합술로 만든 가젤 떼 스케치.
5 코끼리 무덤의 모형. 바닥 문양과 무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6 영양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
7 기린의 축소 모형. 배우의 팔과 다리에 죽마 같은 다리를 붙였다.
8 라피키의 나무가 나오는 무대 디자인.
동물 캐릭터의 특징이 드러난 의상 디자인
의상 디자인 역시 동물의 외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 작품에서는 각 배우가 맡은 동물의 특징이 그대로 의상 디자인에 도입된 경우가 많고, 티몬과 자주의 경우 서구의 전형적인 광대 복장에서 이미지를 차용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의상 디자인적인 특성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암사자들이다. 암사자의 가면과 붙어 있는 의상은 형태나 컬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10대의 암사자 날라는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의상을 통해 세대 차이와 역동적, 개성적인 이미지를 주는 반면, 어른 암사자의 경우에는 어깨를 완전히 덮는 망토를 입고 천에 각각 다른 문양을 새겨 보다 차분하고 집단적인 느낌을 준다. 심바와 날라의 환상 장면인 ‘빨리 왕이 되고 싶어’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의상과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 라피키의 나무를 표현하는 각종 막과 포털 세트에는 아프리카의 고유 문양이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극적인 장면 전환을 이뤄내는 마술 같은 세트 디자인
<라이온 킹>은 복잡하지는 않지만 아이디어가 넘치는 무대 운용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장면 전환 시간을 적절히 활용한 그림자극은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캐릭터 그림 조각을 막 뒤에서 직접 조종하는 방식을 통해움직이며, 뒤쪽 무대가 전환되는 동안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같은 시간, 뒤쪽 무대에서는 가파르고 불규칙한 프라이드 록(무대가 되는 아프리카 정글)의 절벽을 상징하는 반나선형 케이크 모양의 세트가 360도로 회전하면서, 마치 거대한 나사가 조였다가 풀리는 형태로 순식간에 장면 전환을 이루어낸다. 리처드 허드슨이 디자인한 이 세트는 그가 이미 런던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에 도입했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이‘절벽’ 세트는 이후 같은 플랫폼에 얹혀진 ‘코끼리 무덤(하이에나의 본거지)’세트와 교체되어 공간을 변화시킨다.
세트의 마술과 같은 활용 예는 더 있다. 1막 후반에서 심바를 쫓는 들소 떼는 원근법을 적용해 디자인했다. 객석을 향해 돌진하는 들소 떼의 모습을 돌아가는 바비큐 통의 원리로 표현하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유럽의 극장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던 방법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광활한 대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에 대비되는 무대적인 해답이라 할 수 있다. 죽은 무파사의 환영을 연출하는 2막에서도 무파사의 얼굴 조각을 배우들이 하나씩 들고 나와 암전 상태에서 퍼즐처럼 맞추고 조명을 이용해 심바의 회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세트의 기능성과 소품의 세부 묘사라는 특징을 모두 취하며 디테일이 살아 있는 정교한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준다.
<라이온 킹>의 디자인은 결국 동양의 가면극이 가지는 기능성과 배우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서양적인 콘셉트를 적절히 결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줄리 테이머는 서양인들에게 생소하고 낯설기 짝이 없는 동양의 가면이나 형식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놀이로 바꾸어놓았고, 그 대중성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가장 상업적인 공연 무대인 브로드웨이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라이온 킹>의 디자인은 동양의 시각에서 본다면 여전히 서구적이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인들이 공통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충분히 낯설고 아름답다.
기자/에디터 : 전은경
글/ 조용신(설앤컴퍼니 제작감독, <뮤지컬 스토리> 저자) 스케치 컷 제공: 지안북스
디자인하우스 ⓒ Design.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보더빌은 살아있다

로켓쇼를 보면서 나름 감동을 받은 게 있다. 보더빌에는 순서라는 게 있다. 뭐랄까, 전통적인 순서랄까. 로켓쇼는 많게는 하루 다섯 번, 적게는 하루 세 번을 공연한다. 그러려면 손님 빨리 쫓아내고, 하이라이트는 서두에 둬야 한다. 오래 전의 보더빌이 바로 그랬다. 그리고 이 작품도 그렇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 유치뽕짝 뻔할 뻔자 쇼에 75년간 끌어들이고 있는가. 바로 그 뻔할 뻔자 때문이다. 그렇다. 스포츠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 보더빌도 살아있다. 벌레스크도 살아있다. 쇼는 죽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된 전통이 오늘에도 남아있는 걸 보면 묘하게 가슴이 설렌다. 내용이야 어쨋든 말이지.
KNUA Dance company in NY
해롤드 프린스는 ‘이유 없는 춤은 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참 독특한 연출가다. 제작자 출신으로 연출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제작자로서의 흥행 마인드를 놓치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 그는 늘 공부했고, 자신의 내면에서는 뭔가가 모자르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갈구한다. 그가 자신에게 모라자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과거의 무엇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다. 늘 옳다. 우리는 늘 새로운 트렌드가 무엇인가에 집착하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모든 것은 과거에 깊이 천착해 있다. 어쨋든 해롤드 프린스가 ‘이유 없는 춤은 추지 않는다’는 말을 뮤지컬 무대를 가리켜 한 말이었지만 그걸 춤으로 뒤집어 보면 춤의 무대에서는 ‘이유 없는 걸음은 걷지 않는다’ 가 아닐까. 그렇다. 댄서는 무대 위에서… ‘그저’ 걸으면 안된다. 댄서는 한 순간도 무대 위에서 시간을 그저 때워서는 안된다. 그건, 직무유기죄에 해당된다. 그렇게 댄서를 한 순간이라도 버려두는 안무가가 먼저 죄값을 치러야 하지만.
이번이 두 번째라는 한예종의 KNUA 댄스 컴퍼니의 공연을 보았다. 첫번째는 한국무용이었는데, 이거 보면서 아주 기가 질려버렸다. 나는 춤 자체를 잘 모른다. 그러니까 별로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다. 내가 아는 건, 한국 춤에서 여자의 춤은 근본적으로 기생춤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물론 아니지만, 과거에, 그것도 그닥 멀지 않은 과거에 ‘가인’은 몸 파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우리나라 만의 일이 아니다. 가부키만 해도 여자의 출연을 금지시킨 이유가 여자가 무대에 오르면 사내들은 그녀들을 품으려고 닥달을 했고, 결국 돈은 거기서 벌렸기 때문이다. 풍기문란. 하지만 가부키가 남창으로서의 역할을 새로 담당하게 될 줄이야, 그걸 막은 쇼군께서는 짐작을 하셨거나 말거나. 어쨋건 무대에 서는 자는 자신의 ‘몸’을 내보이는 자다. 그 시절에 몸을 내보인다는 것은 이미 그 몸은 ‘주는’ 몸이라는 뜻이다. 왜 보여 ‘준다’고 하는가. 예수님 지적대로 생각만 해도 간음이라는 식의 몽상적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다. 존재하는 물적 존재로서의 ‘몸’이 눈 앞에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은 천한 일이었다. 무대에 서는 몸은 보는 모든 사람들의 ‘소유’다. 그게, 지금에 와서는 티켓 사서 공연 보고 팬클럽에 가입하는 수동적인 행위라면, 그 당시에는 그 ‘가인’은 가질 수 있는 존재였다. 당연히 ‘가인’의 가치는 더 가지고 싶게 만드는 데 달려 있었다. 하지만, 작금에 와서, 작금에 와서도 마당이나 안방이나 폭포 가의 정자가 아닌 조명기 달린 무대에 서서 젊은 댄서들이 날 잡아 잡숴 춤을 추는 걸 보는 건 아연하다. 이 공연의 첫 춤이 바로 그랬다. 아니, 그게 춤의 의도였다면, 대단히 성공하신 게 맞다. 춤사위보다 먼저 눈꼬리 살살 내리며 눈웃음 치는 훈련 먼저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단했다. 무슨 춤에 그렇게 색기가 좔좔 흘러내리는지… 폴 테일러의 Esplanade를 연상케 하는 댄서들의 등퇴장은 가끔 손 끊긴 강강수월레처럼 보이기까지. 나쁘다 좋다를 떠나, 춤이 사람을 ‘홀리는’ 것은 정말 홀림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침 흐르는 좋은 반응이지만 그 홀림이 50년 전의 것이라면, 아주 생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게다가 비록 내가 50년 전에 태어났어도 저 홀림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님에야. 왜.. 왜… 왜…!! 라는 질문으로 가득찼던 첫번째 레파토리. 게다가 결코 그게 섹시한 것은 아니었다. 섹시한 게 좋냐, 라는 질문은 일단 뒤로 빼고.
두번째, 세번째는 … 마리우스 쁘띠빠와 발란신이었는데, 쁘띠빠는 그렇다 치고, 발란신이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만 가득 들었다. 독무 추는 댄서가 착지할 때마다 내가 다 걱정되더라는 말만 해두자.
네번째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음악의 흐름과 몸의 흐름이 맞지 않았다. 이건 결코 음악의 박자와 몸의 박자가 맞지 않았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음악과 몸이 다른 연주를 하는 걸 보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없다. 하지만 때로는 몸이 음악을 배신하기도 하도 때로는 음악이 몸을 배신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배신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직무유기였다. 이 안에는 몇 가지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데, 특히 꼭 따지자면 두 번째 에피소드(였던 것 같다)에서 음악은(아니, 소리는) 극적일 정도로 뚝뚝 끊으며 긴장을 유발하는데, 댄서들은 설렁 설렁 걷는다. 그 순간 잠시… 분노를 느꼈다. 음악이 멈추면 댄서도 멈춘다는 건 우습다. 하지만 그 순간에 아무 긴장도 없이 ‘걷는다’는 건 일종의 배신이다. 그리고 무수한 하얀 공을 들고 노는 장면. 아이디어는 참 예뻤지만 예쁘기만 하고 끝났다. 그 많은 공들이 어떤 리엑션도 유도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이 움직임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그저 살짝 부담스러운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메렝게나 한 판 질펀하게 한 번 추었으면 싶은 그런 흥겨운 음악에서도 댄서들이 줄창 ‘모던!’만 외쳤던 것도 지루. 정말 보기 좋았던 것은 달마시안 같은 젊은 댄서들의 힘이 남아도는 몸이었다. 가끔 한국의 ‘모던 댄스’를 보면서 갑갑하게 느끼는 건 모던을 낯선 움직임으로만 해석하려 드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짐작 때문이다. 불 위의 오징어처럼 뒤틀리는 동작들을 빠르게 나열하기보다는 음악 자체에 좀 느긋하게 귀를 기울이는 게 어떨까 하는 안타까움. 좀 더 넉넉하게 받아들이면 어떨까 하는. 내가 만약 스물이거나 혹은 스물 다섯 근처라면 이 춤을 보면서 댄서들의 테크닉이 모자란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어제 본 건 남아도는 힘이었다. 안무가 이들의 남아도는 힘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이들은 팔팔했다. 근육이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해서는 당장이라도 날듯이 뛰어나갈 듯한 달마시안들이었다. 달마시안은 사냥개다. 하루라도 전력으로 달려주지 않으면 근육에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 죽는 개가 달마시안이다. 이들이 그랬다. 하지만 어제의 춤은 이들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원만 그리며 달리게 했다. 좋은 음악에 힘이 남아도는 몸이 있었는데도 그랬다는 건 안타깝다. 단지, 조금 안타까웠다는 것이지, 사실 전체적으로는 흐뭇할 정도로 좋았다. 그저… 조금 더, 조금 더 바라는 것 뿐이다. 달마시안, 달려!
가장 개판은 조명이었는데, 시간 문제였는지 셋팅에 실패한 듯 했다. 댄서들이 조명 너머로 사라지는 걸 1시간 반 동안 봐봐. 조명 다 뿌개고 싶지. 의상… 마지막 작품만 빼고, 어쩌면 그리 소재가 초지일관 하신지… 그것도 일종의 컨셉이라면야, 뭐.
Twyla Tharp
브로드웨이 연출가가 아닌 안무가로서 나는 싸프 여사를 무척 좋아한다. 물론 그의 안무를 너무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춤이 지극히 미국적이라서 좋다. 그는 미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댄서들의 힘을 최대한 끌어낸다. 음악의 박자보다 반 박자, 때로는 놀랍게도 엇박자로 움직이는 댄서들의 움직임은 어쨋든 짜릿한 쾌감이 있다. 특히 그가 스윙을 배경으로 작업할 때 그런데, 그것은 진실로 재즈의 정신과 맞아 떨어지는 ‘백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임프로비제이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치 거쉰과 빌 에반스가 딱 떨어지는 백인 재즈 오케스트라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늘 그렇지만 거쉰과 빌 에반스의 음악들은 오케스트라나 빌 에반즈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는 오로지 트럼펫 하나, 둥가둥가 베이스 하나 곁들인 기타 연주, 혹은 좋은 흑인 가수의 목소리가 더 좋지만 말이다. 아니, 재즈는 흑인의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특히 이제 와서는 구별도 안된다. 하지만 전 시대에는 틀림없이 구분이 되었다. 싸프는 그 구분이 모호해지는 시대인 60년대부터 안무를 시작했다. 클래식한 발레에서 모던 발레로, 스윙으로, 재즈로 그리고 다시 모든 걸 합치는 시대를 거쳐오는 그의 안무는 나름의 미국식의 클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밀로스 포먼 감독과 작업했던 세 개의 영화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백야’도 그렇고 단 네 개의 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움직임들은 영화 필름에 철썩 달라붙어 배우와 소리와 스텝이 하나로 일사불란하에 움직이는, 뭐 하나도 빠지지 않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헤어가 시작될 때의 그 웅장한 ‘Aquaris’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한 장면 맡을 땐 꽤 하던 이 아줌마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오면 갑자기 팍 신파로 추락을 한다. 이미 전작인 Movin’ out에서 그 전조는 충분히 발견되었다. 이 때 이 아줌마는 시카고 공연의 악평을 계기로 쇼 닥터를 초빙하여 자신의 ‘모던함’을 다 묻어버리는 신파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고역을 치렀다. 그건 틀림없는 굴욕이었지만 결과는 달콤했다. 아줌마는 안무상을 거머쥐었다. 토니상이라는 이 지극히 상업적인 상은 아줌마에게 늦은 나이에 새로운 유혹으로의 초대였고 아줌마는 덥썩 미끼를 물었다. 문제는… 밥 딜런이라는 데 있었다. 사실 나는 밥 딜런과 사프는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밥 딜런의 그 리듬감 있는 웅얼거림, 록이면 록, 포크면 포크, 심지어 블루스까지 뭘 불러도 이 아저씨의 노래는 이 아저씨만의 것이다. 누가 리메이크를 해도 이 아저씨가 부른 원곡을 따라가는 걸 아직 본 적이 없다. 문제는 이 아저씨가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가사도 다 쓰다 보니… 게다가 대부분의 곡들이 왜 썼나, 왜 불렀나, 그걸 부를 때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정황들이 하도 톱니바퀴처럼 딱 맞아 떨어져서 이게 다른 정황에 놓이면 너무 어색하다. 이를테면 이 작품에서 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저씨의 노래 ‘Knocking on heven’s door’는 베트남전에 끌려가기 싫은 사내가 부르는 지옥 가기 싫어요, 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이 뮤지컬 안에서는 세 명의 주요인물 가운데 하나인 Ahrab이 죽으면서 부르는 노래. 이건 완전히 찬송가였다. 천국이 날 부르네, 얼굴도 못 본 엄마, 날 받아줘요, 풍이었다. 아, 죽어가면서 부르는 노래… 맞다. 하지만… 이 아저씨 공연에서 온갖 치사한 짓은 혼자 다 하는 비열한 캐릭터여서 이 자가 죽고 난 뒤 갑자기 축제 분위기가 되게 만든 분이다. 그런데… 이 비장의 무기를 이 아저씨가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모든 게 이런 식이다. 문제는 명확하다. 싸프 여사는 전작의 굴욕에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으셨다. 그래서 밥 딜런의 노래를 모아 이야기를 엮어 보려 하셨지만 그게 엘튼 존이고 빌리 조엘이고 비치 보이즈면 몰라도 밥 딜런은 애당초 글렀다. 밥 딜런은 곡 하나 하나가 최소한 하나의 중, 단편 소설은 되니 말이다. 가사를 바꾸면 더 개판이 될 거고. 하지만 아줌마가 이 작품의 배경으로 막 굴러가는 서커스단을 설정하고 광대들이 단장을 ‘다구리’ 해서 죽이는 설정은 짜릿할 정도로 좋았다. 아니, 이런 막가는 어두운 얘기, 브로드웨이에서 언제 보겠나. 자식새끼가 애비 죽고 새로운 단장이 되어 애비의 여자를 끌어안고 새 시대를 열어간다는 이 정말 막가는 스토리…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토리를… 모두 머릿속으로만 그려야 한다는 게 너무 슬프다. 아무 이유가 없다. 아무런… 정말 아무런 이유가 없다. 스물 다섯 곡이 불리워지는 동안… 그 모든 장면이 따로 놀고, 어느 관객도 이 스물 다섯개의 장면을 이어 맞추질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프 여사가 하고 싶은 말, 보고여주고 싶은 춤… 그런 게 왔다. 이 작품은 춤으로도 노래로도 어정쩡했다. 차라리 그녀의 장기인 찡하게 추는 장면이라도 많았으면 춤이라도 환호를 받았을텐데 세 명은 노래하고 일곱명은 춤을 추다 보니 노래 할 땐 뒤에서 춤 추기 뻘쭘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야, 사실 뻘쭘할 일도 아닌데, 싸프 아줌마가 평소 자기 안무하던 빨로 그냥 밀어붙였으면 괜찮았겠지만 이 아줌마 ‘왜?’ 를 떠올리기 시작하니 그게 안되는 거다. 그러니 배우들은 춤을 추다 말고, 가수들은… 하하… 그 개같은 여배우… 정말 때려 죽이고 싶더라. 그나마 Ahrab 이나 Coyote는 나름 자기 주관을 가지고 부르는데, 이 멍청한 여배우는… 노래 다 말아 먹고… 나중에 훌라푸흐 걸고 나와 ‘Showtime!’을 외칠 땐, 너만 들어가면 그래도 참고 보겠다! 라는 외침이 절로 터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주변 여기 저기서 그녀가 나올 때마다 중반 이후에는 끙! 하는 신음소리가 들리더라니까. 나중에 박수 받는데 정말 웬만하면 박수 쳐줄텐데 박수를 앙상블보다 덜 받았지만 그래도 싸다. 미스 캐스팅도 이런 미스 캐스팅은 처음 본다.
싸프 아줌마. 시카고 휴버트 스트릿 댄스 시절로 돌아오세요. 바람 부는 도시에서 총알과 바람을 뚫고 강하게 댄서들을 키우신 당신이 뉴욕 와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까짓 아줌마 머리로는 도저히 완성이 안되는 ‘드라마’는 버리고 당신 잘하는 그 ‘춤’을 추세요. 그 많은 안무가 출신 연출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브로드웨이의 가장 중요한 쇼비지니스의 연출가 쪽 맥이긴 하지만 아줌마는 아니에요. 아줌마의 마인드는 무서울 정도로 언더에요. 그래서 아줌마가 좋고, 그래서 브로드웨이에서는 안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아줌마가 너무 좋아요. 아줌마가 얼마나 승질이 더럽고 독재자에 개떡같이 캐스트 턱턱 짤라대고 스텝 갈아치운다 해도 내 알 바 아니지. 그냥… 아줌마가 밥 딜런 노래로 정말 춤으로 다시 한 번 승부 거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될 법한 일이 아닐테지만, 어쨋거나, 아줌마 달려!
How many of you know what you want?
일인극 Stanley
Stanley를 보고 왔다. 스탠리, 연극사에 길이 남을 이 유명한 캐릭터, 야수와 같은, 말론 브란도에 의해 완벽하게 육신을 얻은 존재, 작가인 테네시 윌리암스의 의도마저 훌쩍 뛰어넘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오직 단 하나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이 캐릭터를 감히 가지고 논 귀여운 배우가 있으시다. 작품의 가치로서, 완성도를 따지자면 이 작품은 별 다섯개 만점에 별 두 개짜리다. 그나마도 꽤 괜찮은 프로젝션 아이디어와 무대 덕분이다. 배우는 발성도 안되고 몸도 덜 풀린데다 눈빛도 희멀겋다. 왜냐하면 그는 간밤에 음주가 심하셨거든. 배우의 숨결이 객석 전체로 전해지는 그 조그만 극장에서 일인극을 공연하면서 간밤에 마신 술이 덜 깨 무대에 서는 배우는 매장당해 마땅하다. 물론 그는 술이 깼다. 정신은 멀쩡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마신 술은 다음날까지 그 독특한 ‘향기’를 남기지 않나. 보드카를 너무 드셨던 모양이지. 하지만 묘하게도… 스탠리라는 인물과 술냄새가 어울린다. 어울리지 않을 수가 있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외쳤듯이 ‘난 짐승이 아냐!’ 라는 그 말, 그에게서 풍기는 덜 가신 술 향기(웩)와 춤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은 그를 ‘짐승’으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말론 브란도, 그 섹시함의 드럼통에서 건져내신 몸이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기에, 이 술 덜 깬 배우는 그야말로 멍청한 짐승의 자리로 추락한다. 하지만 그 자신도 안다. 하여, 그는 자기 자신을 쓰레기 더미에 던져 쓰레기 가운데 핀 꽃인양 꾸민다. 하지만… 여전히 좋지 않은 발성은… 짜증난다. 더하여 말론 브란도의 흉내를 내는 모습은 상한 시금치를 먹은 뽀빠이마냥 부조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무대에서 나는 심하게 상했다. 그는 홀로 무대에 서서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아니, 그는 다정하게 노크해 줄 그런 배우가 아니다. 그는 무식한 짐승. 그러므로 그는 핏줄이 불끈 드러난 그 주먹으로 관객의 가슴을 친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오직 단 한 줄의 대사로 그는 그 쉽지 않은 짓을 해낸다. 그는 관객에게 묻는다. 매번 다른 표정으로, 매번 다른 억양으로, 매번 다른 감정으로 그러나 물을 때마다 내 가슴은 칼로 베인 듯 날카롭게 자상을 입는다. How many of you out there know what you want? 그리고 이어서 또 묻는다. How many of you are hungry but don’t know what you want to eat? 그렇다. 나는, 지금, 심하게 굶주려 있다. 그의 질문에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차라리 모르고 싶을 정도로 심하게 잘 안다. 하여, 나는 굶주려 있다. 내 얼굴이 너무 심각했나보다. 이런 후진 공연이 나에게 정면으로 들이대다니, 빌어먹을! 나는 세번째 줄 한가운데 섬처럼, 오직 한 명 뿐인 동양인 여자로 앉아 있었기에 그는 공연 내내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다. 소극장에서 세번째 줄에 앉을 때는 배우와의 대면을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관객으로서 배우를 동경한 적이 없는 나는 단 한 번도 배우와의 대면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는 나를 가리키며 liar!라고 외쳤다. 물론 오직 나만을 가리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손 들지 않은 사람들 하나 하나를 가리켜 외쳤다. 그 때 그의 질문은 How many of you lost everything ever you want? 였다. 나는 거의 손을 들 뻔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하여, 나는 손을 들지 않았고 그가 오른팔을 쭉 뻗어 검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liar!하고 외칠 때 고개를 끄덕이며 yes, you are. 하고 응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웃었고 그도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웃었다.
대본은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커다란 덩어리를 삼키지 못한 채 작고 음향 형편없는 극장을 떠났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배우라도 무대 위에 서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에는 무한한 힘을 지닌다. 오늘의 그 배우가 그랬다.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를 형편없는 발성과 성대모사도 제대로 못하는 배우. 그러나 그는 내게 물었다. Do you know what you want? 하고. I know what I want is that what I have not to want. 하고 나는 대답했다. 마음 속으로만. 그랬다. 나는 내가 바래서는 안되는 것을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 공연에서, 이 형편없는 공연에서 내 자신과 대면했다. 나의 이기. 나의 자존감. 나의 존재. 이 공연을 나는 그러므로 결코 잊지 않을테다. 질문을 던지려면, 직구로, 스트라이크로 던지라. 할 말이 있을 때는 두 눈을 똑바로 보며 제대로 칼을 꽂아라. 비록 상처를 입을지라도 그러는 그대를 미워하지는 못하리라. 공연에서 스탠리가 외쳤던 그 대사를 조금 바꾸면 바로 내 심정. 하지만 누구에게 추천하기에는 공연 자체가 지나치게 수준미달이다. 상가집 가서 지 슬픔으로 겨워 우는 여편네가 바로 이 공연을 보던 나였다. It turned my mind absolutely upside down. … It was fantastic!
사족이지만 욕망기차 안의 두 자매, 별소녀 스텔라, 순수소녀 블랑쉬…아아… 테네시 윌리암스의 작명센스는 정말… 미치겠다 진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