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재에 ‘존엄’을 붙일 수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스스로를 비춰 보더라도 다른 인간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다. 믿자, 믿자고 수많은 매체들이 말하는 이유는 결코 믿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뿐이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의 위대함이 그의 위선과 그의 나약함을 밟고 일어서게 해주는 인간도 간혹은 있다는 사실에는 모골이 송연하다. 자세한 리뷰는 시간 날 때 다시. 필립 그라스는 음악 그 스스로가 무대를 연출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이번에 다시 재확인 했으며 사랑스러운 엽기 괴짜 맥더못이 이제 다른 문을 열고 거장의 대열에 편입했음을 확인했다. 
뮤지컬 라이온 킹 : 월간 디자인
디즈니와 줄리 테이머의 만남이 일으킨 뮤지컬 디자인의 혁명
뮤지컬 <라이온 킹> 원문 기사 보기
우리에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익숙한 <라이온 킹>은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뮤지컬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엘튼 존의 음악과 드라마도 빼놓을 수 없지만, 동물 캐릭터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해낸 놀라운 솜씨와아프리카 사바나의 정글을 환상적으로 재현한 무대 세트가 압권이다. 단순한 애니메이션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어낸 뮤지컬 <라이온 킹>의 진정한 주인공, 디자인을 만나본다.
뮤지컬 <라이온 킹>의 진정한 주인공, 디자인
<라이온 킹>의 첫 장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150년의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 장면중 하나로 선정될 가치가 있다. 아프리카의 광활한 자연과 동물들이 평온한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훗날 왕이 될 어린 사자 심바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 분위기의 막이 열린다. 이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바로 동물의 표현 방식이다. 기린을 연기하는 배우의 두 팔과 두 다리에 죽마를 연결하여 길이를 표현하고 기린의 목과 머리는 긴 모자처럼 머리에 써서 표현한뒤 묘기를 부리듯 우아하게 걷는 모습은 인간의 관절과 동물 관절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해 예술적으로 양자를 결합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네 사람이 각각하나의 다리를 연기해 크기에 대한 현실감을 부여한 코끼리, 수레바퀴를 이동시켜 회전하며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젤이나 배우가 연처럼 공중에서 돌리는 독수리 장대 등은 동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데 다양한 예술적 표현 방식을 도입하기 위해 창작진이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라이온 킹>에서 동물 캐릭터를 표현하는 핵심은 얼굴을 드러낸 배우들이 직접 조종하면서 표현하는 동화적인 디자인이다. 이는 일찍이 연출가 줄리 테이머가 일본에서 오자와 세이지가 지휘한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렉스>(1992)의 연출을 맡았을 때 이미 시험해 호평을 받은 적이 있는방식이다. 그전까지 줄리 테이머가 만든 가면은 배우의 얼굴을 가리는 고전적인 형식이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이자 프리 마돈나인 제시 노먼의 얼굴을 이전과 같은 방식의 가면으로 가리는 게 아깝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성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가면을 포기하지 않은 줄리 테이머는 배우의 얼굴도 드러내고 가면도 제 역할을 하면서 배우들의 목소리와 표정에 가면이 오버랩되는 것을 원했다. 그 결과 가면을 얼굴에 쓰지 않고 로마군 투구처럼 얹는 방식으로 결정되었고 이는 4년 후 <라이온 킹>에 더욱 발전된 형태로 도입되었다. 따라서 관객들은 무파사, 스카, 심바, 날라 등의 사자 형상의 가면과 실제 배우의 얼굴을 동시에 보면서 동물과 배우로서의 인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고정되어 있는 동물의 표정에 드라마틱한 감정을 불어넣는 것도 배우의 표정 변화로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1 아프리카 사바나의 아침을 표현한 첫 장면. 커다란 태양이 떠오르면 키 큰 기린 두 마리가 태양 앞을 지나고 이어 치타와 가젤 영양들이 하나 둘 등장한다. 무대 디자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
2 스카와 무파사가 대결하는 장면.
3 스카의 삐딱한 성격을 표현하는 의상 디자인 스케치.
4 위풍당당하게 표현된 무파사의 의상 스케치.
5 차분하고 집단적인 느낌을 주는 암사자 의상.
6 라피키는 얼굴 분장만으로 캐릭터를 표현했으며, 의상을 통해 개코원숭이의 특징과 체형을 명확히 보여준다.
배우와 인형이 합체된 캐릭터
배우의 두 다리를 앞다리로 사용한 얼룩말과 뒷다리로 사용한 치타에서는 얼굴까지 덮는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인형사가 두 팔, 두 다리(혹은 네 다리) 인형을 조종함으로써 배우의 존재를 감추는 일본의 인형극 *분라쿠의 조종기법을 도입했다. 이 경우에도 얼굴은 드러냈다. 이렇게 배우와 인형이 동시에 하나의 캐릭터로 드러나는 방식은 얼굴 위에 가면을 쓴 사자의 표현 방식과 내적으로 동일한 콘셉트로 볼 수 있다. 또한 선악과 진화의 정도에 따라 인형의 외적인 표현 방식도 구분했다. 가령 사자 전체와 그들의 친구 티몬, 코뿔새 자주는 두 발로 걷게 해 직립인간처럼 우월한 권위를 부여한 반면, 하이에나 등 악역은 진화가 덜 된 네 발 달린 동물로 표현하고 있다. 심바의 친구 중 지능이 떨어지는 멧돼지 품바도 자세히 보면 뒷다리가 붙어 있다. 디즈니식의 권선징악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단순화 하는 문제에 대한 디자인적인 화답인 셈이다. 품바, 티몬, 자주, 하이에나의 경우는 여타의 동물이나 사자 캐릭터와는 달리 배우가 매우 짙은 분장을 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극중에서 희극적인 캐릭터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다. 첫장면에서 정글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주술사로서 심바를 왕의 길로 인도하는 개코원숭이 라피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상징하기 위해 원숭이 인형을 부착하지 않은 채 배우의 얼굴 분장으로만 캐릭터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렇듯 <라이온 킹>에는 총 230여 개의 실물 크기 인형과 그림자 인형 등이 출연한다. 가면은 종이나 점토로 만든 성형 위에 실리콘을 분사한 뒤 고무막이 형성되면 그것을 벗겨내고 마지막에 탄산 흑연을 사용해 제작한다. 만약 나무를 가면 재료로 사용한다면 배우의 연기에 지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무겁기 때문에 탄산 흑연을 재료로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1 무파사나 스카와는 달라야 하는 심바의 가면은 로마군 투구처럼 턱 부분이 없는 형태로 디자인했다.
2 10대가 된 심바의 의상 스케치.
3 줄리 테이머의 치타 스케치. 배우가 어떻게 인형과 한몸으로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4 인형 조합술로 만든 가젤 떼 스케치.
5 코끼리 무덤의 모형. 바닥 문양과 무대의 구조를 알 수 있다.
6 영양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
7 기린의 축소 모형. 배우의 팔과 다리에 죽마 같은 다리를 붙였다.
8 라피키의 나무가 나오는 무대 디자인.
동물 캐릭터의 특징이 드러난 의상 디자인
의상 디자인 역시 동물의 외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 작품에서는 각 배우가 맡은 동물의 특징이 그대로 의상 디자인에 도입된 경우가 많고, 티몬과 자주의 경우 서구의 전형적인 광대 복장에서 이미지를 차용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의상 디자인적인 특성이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암사자들이다. 암사자의 가면과 붙어 있는 의상은 형태나 컬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10대의 암사자 날라는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의상을 통해 세대 차이와 역동적, 개성적인 이미지를 주는 반면, 어른 암사자의 경우에는 어깨를 완전히 덮는 망토를 입고 천에 각각 다른 문양을 새겨 보다 차분하고 집단적인 느낌을 준다. 심바와 날라의 환상 장면인 ‘빨리 왕이 되고 싶어’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 의상과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 라피키의 나무를 표현하는 각종 막과 포털 세트에는 아프리카의 고유 문양이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극적인 장면 전환을 이뤄내는 마술 같은 세트 디자인
<라이온 킹>은 복잡하지는 않지만 아이디어가 넘치는 무대 운용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장면 전환 시간을 적절히 활용한 그림자극은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캐릭터 그림 조각을 막 뒤에서 직접 조종하는 방식을 통해움직이며, 뒤쪽 무대가 전환되는 동안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같은 시간, 뒤쪽 무대에서는 가파르고 불규칙한 프라이드 록(무대가 되는 아프리카 정글)의 절벽을 상징하는 반나선형 케이크 모양의 세트가 360도로 회전하면서, 마치 거대한 나사가 조였다가 풀리는 형태로 순식간에 장면 전환을 이루어낸다. 리처드 허드슨이 디자인한 이 세트는 그가 이미 런던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에 도입했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이‘절벽’ 세트는 이후 같은 플랫폼에 얹혀진 ‘코끼리 무덤(하이에나의 본거지)’세트와 교체되어 공간을 변화시킨다.
세트의 마술과 같은 활용 예는 더 있다. 1막 후반에서 심바를 쫓는 들소 떼는 원근법을 적용해 디자인했다. 객석을 향해 돌진하는 들소 떼의 모습을 돌아가는 바비큐 통의 원리로 표현하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유럽의 극장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표현하는 데 사용하던 방법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광활한 대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에 대비되는 무대적인 해답이라 할 수 있다. 죽은 무파사의 환영을 연출하는 2막에서도 무파사의 얼굴 조각을 배우들이 하나씩 들고 나와 암전 상태에서 퍼즐처럼 맞추고 조명을 이용해 심바의 회상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세트의 기능성과 소품의 세부 묘사라는 특징을 모두 취하며 디테일이 살아 있는 정교한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준다.
<라이온 킹>의 디자인은 결국 동양의 가면극이 가지는 기능성과 배우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서양적인 콘셉트를 적절히 결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줄리 테이머는 서양인들에게 생소하고 낯설기 짝이 없는 동양의 가면이나 형식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놀이로 바꾸어놓았고, 그 대중성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가장 상업적인 공연 무대인 브로드웨이에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라이온 킹>의 디자인은 동양의 시각에서 본다면 여전히 서구적이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인들이 공통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충분히 낯설고 아름답다.
기자/에디터 : 전은경
글/ 조용신(설앤컴퍼니 제작감독, <뮤지컬 스토리> 저자) 스케치 컷 제공: 지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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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eutenant of Inishmore
@ Lyceum Theater
영국 출신 극작가 마틴 맥도너는 젊다. 그가 스물 여덟의 나이로 <리네인의 미의 여왕>(Beauty Queen of Leenane, 1998)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을 때 이미 그는 영국의 가장 촉망맏는 젊은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영국 연출가 게리 하인즈는 영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토니상 연출상을 받았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자리잡은 드루이드 극장에서 처음 공연한 1996년 1월 이후 바로 런던의 웨스트 엔드로 옮겨갔고 2년 후에는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인 아틀란틱 극장에서 공연되었으며 바로 석 달 후에는 브로드웨이로 올라가는 등 빠른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그의 작품은 롱런하지는 못해도 나름대로의 팬층을 형성하면서 불과 7년 사이에 네 개의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올라오면서 주요한 작가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최근 그와 함께 영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또래의 <마켓 보이>(Market Boy)의 작가 데이빗 엘드리지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데이빗 엘드리지가 마치 미국 작가들처럼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갈수록 깊이 천착해 들어간다면 마틴 맥도너의 작품은 처음에는 아일랜드의 오지에서 시작하여 닫힌 사회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분노가 어떻게 작은 마을 안에 갇혀 개개인을 향해 칼처럼 날아가는가를 보여 주었다면 나중에는 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쪽으로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그 증거가 바로 그의 세 번째 브로드웨이 상연작이었던 <필로우맨>(Pillowman)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브로드웨이 상연작인 <이니시모어의 중위>는 쓰여진 순서로는 <필로우맨>보다 앞쪽이면서 그의 작품의 변화를 감지하게 해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데뷔작인 <리네인의 미의 여왕> 은 두 모녀의 애증을 다룬 작품이었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돌보는 바람에 혼기를 놓친 사십 줄에 들어선 딸의 서로를 못 죽여 안달하다 결국 딸이 어머니를 죽이는데 성공(!)하는 내용으로 이 작품 어디에서도 모녀지간의 애틋함은 털 끝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초장부터 거대한 덩치의 어머니는 장을 보고 들어선 딸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온갖 잔소리는 물론 딸의 동정을 자아내기 위한 꾀병까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는 비열한 노인네고, 그 노인을 대하는 딸은 물을 마시려고 집어든 컵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만큼 자신의 친 어머니를 증오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들이 왜 그렇게나 미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한참 어지러웠던 시절의 아일랜드의 현실과 맞물려 돌아간다.
영국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IRA를 결성해 무장 항거를 시작했지만 덕분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출구 없는 암흑같은 삶으로 빠져들어갔다. 사내들은 무기를 들고 집을 나갔고 여자건 남자건 살아남는 게 일단 급선무였다. 아일랜드라는 척박한 땅에서도 또 전기마저 까막까막 들어왔다 말았다 하는 믿을 수 없을만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도 이들 모녀는 그들의 생계수단인 주막, 그것도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하루에 두셋 뿐인 말 뿐인 곳에 갇히다시피 하여 서로의 분노를 서로에게 쏘아대는 것 말고는 남지 않은 인물들이다. 게다가 마지막 순간이 오면 관객들은 이런 결말마저 이 작은 마을에서는 그닥 낯선 일이 아님도 깨닫게 된다.

.사람보다 귀한 고양이 목숨?
주인공인 페드레익은 ‘자칭’ 이니시모어의 중위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아버지인 도니조차 어쩌지 못한 개망나니였지만 그의 아버지 역시 아내를 두들겨 패던 망나니였었다. 페드레익은 자신의 불행을 전적으로 자신을 잘못 키운 부모에게로 돌리지만 어머니를 가끔 두들겨 팼던 아버지 도니는 차라리 인간적인 인물이다. 사건의 발단은 도니의 주막 일을 가끔 거드는 소심한 동네 청년 다베이가 동생의 분홍 자전거로 그 무서운 페드레익이 애지중지 하는 고양이를 치어 죽이는 엄청난(?) 사건 때문에 시작된다.
소심한 다베이는 이 일을 절대 페드레익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도니에게 사정사정 하지만 도니 역시 이 일이 아들에게 발각되었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두렵기는 마찬가지. 결국 아들에게 전화해서 고양이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만을 전한다. 그 때 페드레익은 제임스라는 마약상을 거꾸로 매달고 고문하는 일에 바쁜 중이었다. 청소년에게 마약을 판다는 이유로 제임스를 고문하는 페드레익은 첫 등장으로 이미 관객에게 제정신이 아닌 인물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내 보인다. 청소년에게 마약을 파는 제임스는 물론 악당이지만 자신이 직접 심판자이자 집행자의 역할까지 자처하지만 누구도 그 권한을 부여해 준 적이 없는 페드레익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피를 흘리는데도, 그 입에서 나오는 시니컬하면서도 앞 뒤가 안 맞는 멍청한 대사들 때문에 관객은 웃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은 패드레익 뿐만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똑같다.

이를테면 페드레익이 고양이의 상태를 보기 위해 돌아온다는 소식에 놀란 다베이가 여동생의 고양이를 물들이기 위해 구두약을 발라대는 장면에서 이 작전이 말도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오로지 무대 위의 다베이와 도니 두 사람 뿐이다. 페드레익이 돌아온다는 소문은 빨리도 돌아 조직 안에서도 골칫덩어리인 그를 없애기 위해 동네 깡패같은 존재인 IRA의 떨거지같은 세 명이 모인다. 사실 페드레익 역시 IRA에 가입하기를 원했지만 대체 이념이라고는 없이 잔인하기만 한 인물을 받아들여주는 조직이 있을 턱이 없기에 쫓겨난 뒤 자칭 혼자만의 잔인한 처벌을 하고 다니던 중이었고 그런 행각은 조직의 입장에서는 환장하고도 남을 정로도 어이없는 살륙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동네 청년인 다베이를 묶어놓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던 페드레익은 이번에는 주막으로 쳐들어온 이 세 깡패로부터 죽임을 당할 처지가 되지만 웬걸, 분홍 자전거의 주인인 다베이의 여동생 메어리드의 출현으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깡패 세 명은 관객의 눈 앞에서 페드레익의 손으로 사살된다. 한 명 한 명이 총을 맞고 죽을 때마다 정교하게 계산된 피가 뿜어져 나오고 배우는 피투성이가 되어 픽 픽 쓰러진다.
작품 말미에서 관객들은 주인공인 페드레익보다 한 술 더 뜨는 그의 여자친구 메어리드의 실체에 경악하게 된다. 메어리드는 페드레익과 함께 그의 아버지와 자신의 오빠를 처단하고 동네를 떠날 계획이었지만 화장실에서 구두약을 뒤집어쓴 고양이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그걸 죽인 사람이 바로 페드레익이란 사실을 알자 서슴없이 페드레익의 머리에 총을 쏜다. 나이가 어릴수록 잔인함이 더욱 극에 달하는데, 그만치 죽음에 무감하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극은 허망해지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머레이드가 떠난 후 악몽같은 날이 밝아오는데, 죽은 줄 알았던 패드레익의 고양이가 돌아와서는 밥을 달라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힌 도니와 다베이는 자신들이 당한 수모가 다 그 고양이 탓이라며 바닥에 흩어진 총을 집어 고양이를 겨누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평범한 인간에 대한 진실이다. 고양이 한 마리 쏘지 못하는..피, 너무 많아서 놀랍지도 않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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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d’Arcy James (left), Andrew Connolly and Dashiell Eaves |
이 작품은 시작부터 피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내내 관객들은 웃어야만 하는 기가 막힌 딜레마에 시달린다. 무대에서 피를 보는 것은 사실 그닥 달갑지 않은 일이다. 봐도 별로 무섭지가 않기 때문이다. 호러 장르는 영화에서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무대에서는 그닥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무대 기술이 발달함과 동시에 소품도 발달해 왔고 피 역시 발달해 왔다. 이를테면 영화에 쓰이는 피보다 좀 더 점도가 높고 색이 짙은 무대용 피는 배우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과 배우의 옷에 묻는 것, 시체에 쓰이는 것 등이 모두 다른 제조법으로 만들어진다. 이 작품에서 피는 관객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쓰이지 않는다. 극도로 비현실적인 죽음 앞에서, 즉, 코미디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을 더욱 더 강조하는 소품으로서 쓰이며 넘치는 피와 넘치는 코미디로 ‘죽음’과 ‘살인’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되묻고 있다.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단지 고양이 하나 뿐이라면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순식간에 무시될 수도 있지 않나며 뻔뻔한 얼굴로 되묻는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 무대에 선 배우들의 역량에 조금 문제가 있다. 200석짜리 아틀란틱 극장에서 할 때는 무리가 없었지만 천석이 넘는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자 이들의 연기는 지나치게 위축되었다. 섬세한 연기를 필요로 하는 소극장 무대와 멀리 있는 관객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대극장 연기는 확실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연극의 경우 마이크의 사용을 뮤지컬에 비해 훨씬 소극적으로 사용하여 배우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에 더 더욱 경험이 적은 배우들에게는 쉽지 않은 공간이다. 페드레익 역의 데이빗 윌못, 깡패 두목 역의 앤드류 커널리 등을 제외하면 배우들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게다가 변환 없는 무대를 억지로 바위산을 끼워넣은 무대 디자인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 프러덕션은 애당초 큰 극장에 어울리는 규모를 지니지 못했기에 롱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틴 맥도너의 팬이라면 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열광하며 짧은 공연 기간을 결코 놓치지 않았을 블랙 코미디였다.
창작뮤지컬 : 컨페션
작년 한해 호평을 받고 현재도 장기 공연중인 뮤지컬 <밑바닥에서>의 왕용범 연출, <뮤직 인 마이 하트>, <폴 인 러브>, <살인사건>의 작가/연출가 성재준의 대본, TV 배우 출신으로 최근까지 <아이 러브 유>로 인상깊은 연기를 펼쳐 뮤지컬 배우로 거듭난 정성화, <그리스>, <드라큘라>를 통해 가창력을 선보인 여배우 윤공주 등 현재 뮤지컬 계에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제작진/배우들이 만든 창작 뮤지컬 <컨페션>이 개막했다.
<컨페션>은 ‘피아노 바’인 변두리의 레일로드 카페를 배경으로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가수를 꿈꾸는 스타지망생 김태연(윤공주 분)과 청력을 잃어가는 ‘베토벤 증후군’을 앓고 있으면서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과거 무명시절 자신이 일했던 옛 카페를 찾아온 유명 가요 작곡가 이주현(정성화 분) 사이의 애틋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주현의 헤어진 옛 예인이자 그의 곡으로 스타 가수가 된 이혜미(최우리 분)가 다시 나타나면서 삼각관계가 형성되는데 결국 이주현은 새로운 사랑 대신 옛 사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근래에 만들어진 창작뮤지컬 가운데서 보기 드물게 진지한 주제를 택하고 있다. 작곡가에게 가장 큰 형벌인 청력 장애를 가진 이주현과 가수가 되고 싶지만 기회가 없는 변두리 까페의 웨이트리스 김태연의 첫 만남과 그의 옛 애인과의 삼자 구도는 일단 설득력이 있다. 거대하게 재현한 무대 셋트와 카페의 컨셉을 살린 철길 셋트 역시 크지 않은 충무아트홀 소극장 무대를 가득 채워 포만감이 들게 한다. 박초롱의 음악은 최근 창작뮤지컬 중에서 가장 완성도 있는 좋은 선율을 가졌다는 점도 이 작품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극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 무리수가 엿보인다. 무엇보다도 극의 무게중심이 분산되어 있다. 초반에는 김태연(윤공주) 중심으로 극이 진행되는가 싶더나 중반 이후에는 이주현(정성화)이 그 바톤을 이어받고 후반부에는 다시 뒤늦게 등장한 이혜미(최우리)에게 갑작스런 비중이 쏠린다. 특히 이혜미의 등장으로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이주현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간다는 결말이 급작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려면, 그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뮤지컬 적인 장치가 필요한데, 가령 초반부에 이혜미가 정말 실력 있는 가수라는 것을 뮤지컬 시퀀스로 보여준다든지 현재 이주현과의 헤어짐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암시적인 장면을 부가시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든다.
앙상블들이 등장해서 환상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문제점이 보인다. 가령 웨이트리스 김태연이 상상 속에서 스타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다른 배우들이 완벽한 의상으로 갈아입고 그녀의 코러스 겸 백댄서 역할을 하지만, 노래와 춤이 끝난 후 현실의 카페로 돌아와서도 암전이 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극이 진행되는 장면은 뮤지컬의 기초 문법에 이탈해있다.
시각적으로 아기자기함을 주는 철길은 -제작진이 의도했건 안했건- 객석에서 보면 무대(김태연이 갇혀있는 카페)와 객석(드넓은 바깥세계)을 정확히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극 중반에 느닷없이 카페 사장이 관객들에게 맥주를 나눠주는 장면에서 철길을 건너는데 이 행위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움이 든다. 물론 이 부분은 PPL를 위해 극의 맥을 어쩔 수 없이 끊게 되는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극 전체적으로 카페 안에서만 머물게 되는 설정도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사랑의 진도가 더딤에도 불구하고 김태연이 카페안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일하면서 다음 장면이 계속 카페로 이어지게 된다. 철길 역시 초반에는 레일로드 카페의 인테리어의 느낌이 강한데 후반부에 실제 야외의 철길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조명을 비롯한 전체 분위기가 야외의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나마 유일한 공간 이동의 재미가 희석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인터미션 없이 100분간 극을 진행하는 방식은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할 때 맞는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다만 주인공들의 미묘한 감정선을 노래로서 살리기 위해서는 다소 작품의 분량이 짧은 면도 보인다. 이혜미의 갑작스런 등장 이후 기본 구도는 삼각관계로 바뀌지만 그 이전에 이주현은 김태연에게 마음을 흔들릴 정도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오로지 철길 장면 하나로 둘 사이가 급격하게 발전하기에는 설명이 다소 부족한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애초부터 둘 사이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운명으로 설정되었고, 그래서 바로 이주현이 옛 애인에게 쉽게 돌아가 버린다면 이 작품은 스토리가 빈약한 작품이 되어 버릴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컨페션>은 좋은 주제와 설득력 있는 시놉시스를 가졌지만 작품의 컨셉과 무대 행위들이 묘하게 겉도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극중 비중이 높은 세명의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과 가창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장점이 크며, 최근 창작뮤지컬의 제작 붐을 이끌고 있는 제작진들이 계속해서 한국적인 주제와 설정을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느껴지는 작품으로서 앞으로의 선전을 기대한다.
Jonathan Pryce in Dirty Rotten Scoundrels

왼쪽부터 Norbert Leo Butz, Jonathan Pryce, Rachel York
프로듀서스에 이어 내가 사랑하는 뮤지컬 코미디 Dirty Rotten Scoundrels. 사실 작년 한해 이 작품과 The Light in the Piazza, 두 작품으로 인한 포만감으로 일년을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Spamalot도 있었지만 그건 포만감이 넘친 나머지 먹었던 걸 다시 확인한 경우라고나 할까…)
오리지널 존 리스고우 아저씨 후임으로 들어온 배우는 다름 아닌 조나단 프라이스 그래서 할 수 없이 지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절묘하게 막판 인터넷 할인 정보를 이용해서 절반값에 극장에서 제일 좋은 좌석에 앉는 행운까지… 존 리스고우가 뻔뻔함에 침튀기는 파워까지 갖춘 사기꾼이라면 조나단 프라이스는 미워할 수 없는 -극중 대사처럼 아무리 해도 uncharming이 될 수 없는- 그대 품에 안겨 영원히 속고 싶은 느낌을 주기까지 하는 사랑스러운 사기꾼을 연기하셨다.
<미스 사이공> 초연 당시 엔지니어를 맡아 ‘아메리칸 드림’을 뇌쇄적인 허리돌림으로 잘소화해냈다는 사실은 이미 영상 자료로 확인했지만 런던의 <나인> 초연때 맡았던 귀도 역은 영상 자료조차도 본적이 없어서 영원히 궁금할 것 같고, 영화 <에비타>에서 아직 팽팽하던 페론 대령의 얼굴을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초로의 신사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를 무대에서 직접 보게 된건 행운이었다. 왜냐면 지금은 캐스트가 또 바뀌어 이 작품에서 조나단 프라이스를 다시 볼래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는 작년에 비해 전반적으로 포만감을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한해가 되고 있는거 같은데 할 수 없이 조나단 프라이스 포스터라도 뜯어먹으며 이 허기짐을 달래야 되겠다. T.T
Everything’s Turning Into Beautiful
다프네 루빈-베가, 오리지널 렌트의 발칙한 미미역으로 확 시선을 사로잡았던 카리스마틱한 배우다. 오리지널 시디를 들으면 알겠지만 이 여자의 허스키하면서도 힘이 가득한 목소리는 관객들의 시선을 떼질 못하게 한다. 그 이후로도 이 분이 납시는 공연이면 일단 믿고 보는데 하나도 실망한 게 없었다. 사실 그 모든 작품이 카리스마가 만빵하셨다. 그런데… 이 공연.. 소위 데미-뮤지컬이라고 할 만한 이 작품에서… 이 분, 완전히 변신하셨다. 그동안의 발칙하고 뻔뻔하고 당당하셨던 그 분위기 다 버리고… 어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여자인 나 마저도 무대 위로 뛰어올라가서 머리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물론 내뱉는 단어들은… 그게 한국말이었드면 … 닭살이 우드드 돋으면서 홀딱 깼을 거다. 손톱을 귀엽에도 잘근잘근 물면서 ‘으음, 나는,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은 결국 거짓말을 노래하는 거야!’ 하고 말하는 그 모습… 어흑. 여자들이여, 애교가 뭔지 배우고 싶다면 이 공연에서 루빈-베가양으로부터 배우시오! 아니, 루빈-베가가 연기하는 브랜다로부터 배우시오. 아우… 뭐가 말투부터… 아니 문 열러 나올 때부터… 심싱치 않으심.
암튼… 이 미치고 팔짝 뛰게 하는 흑인 로맨스 드라마… ㅡ.ㅡ;; 는 말하자면 순수하고 음악에 순수한 열정을 지닌 브랜다(게다가 힛트곡도 하나 낸 조금은 잘 나간 뮤지션인, 순수하다 라고는 해도 한국적 상상은 금물. 이게 흑인 캐릭터면 당연히 홀딱 섹시하고 당연히 홀딱 날라린데,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왕내숭 모드로 순식간에 돌아와야 함)가 온갖 브랜다 친구들과 다 잤던 개바람둥이 샘을 붙잡아 놓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내용이다. 그 와중에 둘 다 뮤지션인지라(샘은 브랜다와 왕년에 함께 음악작업을 했던 동료+음음) 둘이 랩이면 랩, 소울이면 소울, 브루스까지 막 부르고 추고, 놀고 하는데, 노래 자체는 정말 아니올습니다만, 두 분이 그 같잖은 노래에 서로의 배역으로서 완전 이입해서는 노래+연기를 하시니 관객들이 정말 미치더군.
결국 이 작품은 내용은 정말… 언급할 가치도 없지만 두 배우님께서 입신에 오르신 연기의 경지를 보여주시며 모든 헛점을 메꿔주신 놀라운 작품이렷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침내 샘이 눈물을 보이며(젠장!) 브랜다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자 브랜다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하더니 마침내 네고를 하자며, 노트를 들고 써내려가는 장면은… 으윽… 쓴다고 뭐가 바뀌냐? 게다가 한단 말이, 세탁이랑 요리는 내가 할께. 나 그거 좋아하거든. 이러는데, 으윽… 뭐 좋다니 좋다만. 암튼… 마지막 장면은 어쨋거나 해피앤딩인데, 결국은 사회적으로 능력 있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남자 보는 눈은 지지리도 없어서 개바람둥이에게 어떻게 엮여 들어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아주 교훈적인 연극이렷다. 사실 대사로 보면 결혼도 아이 생각도 없는 남자에게 여자가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있겠냐며 딜을 하는 건데, 아니 말로는 뭘 못해! 아주 흑인 아줌마들은 미쳐 날뛰더구만. 기립박수 치고… 막 브랜다에게 이입해서는… 아이구. 나참. 2막 시작 무렵에 남자 주인공이 팬티만 입고 일어선 순간 흑인 아줌마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 프하. 아니… 그래… 좀 심하긴 하더라만 그렇게 티를 내슈들. ㅡ.ㅡ;; 어쨋든 정서가… 정서가 정말 다르다는 걸 새삼 느끼고 왔다.
루빈-베가 언니, 사랑해요! 흑… 그래도 담엔 좀 제대로 된 작품에 출연하셔서 맘 놓고 연기하슈. 이번에 드럽게 고생하셨다는 후일담이 여기 저기 퍼져 있다. 암튼 이 두 분의 치고 빠지고 삐치고 또 돌아서고 하는 쥐었다 놨다 하는 연기는 압권이었다. 작은 무대일수록 배우가 신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주십니다. 게다가 배경이 겨울이라(크리스마스 이브!) 두 사람이 처음에는 꼭 껴입고 나오는데 그렇다고 이 배우들이 땀 삐직거리면 대략 좀 뻘쭘하잖나. 그래서 극장 안이… 겨울처럼 추웠다. 공연 보고 나오는데 더위에게 한 30초간 감사를 드렸다.
Spelling Bee @ Circle in the Square
말장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단어 장난. 하지만 그것으로도 뮤지컬은 만들어질 수 있었다. 누가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음악이라고 했던가? (바로 나! ㅋㅋ) 이 뮤지컬의 스타는 바로 작가 레이첼 셴킨이다. 그의 펜끝에서 뿜어나온 단어들은 작곡가의 콩나물 대가리를 저쪽에 멀리 치워버렸다. 뮤지컬을 보면서 이토록 음악에 신경을 안쓰고 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대본에 대한 칭찬인가. 당연하지. 그럼 음악에 대한 실망인가? 그건 아니다. 하지만 윌리엄 핀의 음악은 비록 작곡가들에게 전범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관객의 마음을 파고들지는 못한다. 그의 음악은 ‘그를 위한’ 음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체 왜 발전이 없으시냐고…

극장에 갔다가 마시 박(사진)역의 데보라 그레익 대신 다른 배우가 나온다는 공지를 보고 주저없이 발길을 돌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국계 입양아 출신으로 브로드웨이에서 한국계 미국인 학생역을 맡았다며 한때 한국의 매스컴의 한켠을 장식했던 그의 활약을 못본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결국 다음날 공연에서 그를 보게 되었다. 예상대로 그의 연기는 신들렸다. 뽕맞고 작두를 타는 기운도 느껴졌다. 어려서 한국에서 입시지옥을 경험하고 너무 억눌려 살다보니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있는 아이 역이라는 식으로 소개가 된 기억이 나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또라이’다. 어찌나 실감나게 연기를 하는지 이 또라이가 자기 차례가 되면 무슨 사고를 칠까 긴장하게 되더라는.. 혼자 원맨쇼를 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탄성이 나왔다. 이 배우는 앞으로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철자법 경시대회에서 출연하는 학생들의 대회 모습과 각자의 독백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나뉘어 있는 이 작품은 어찌보면 외형적으로 너무나 뻔한 구성을 가졌다. 극장이 서클 인 더 스퀘어니 무대 장치에 대해 일찌감치 포기하고 갔을테고 (무대에 풀장을 만들지 않는 한) 작은 스테이지에 많은 객석. 오히려 좋은 조건이 아닌가? 제임스 라핀의 연출은 좋았다. 그 환경에서 나름 최대치를 뽑아냈다고 생각한다.
그날 그날의 관객중에서 공연에 함께 참가하는 스펠러들이 네명 있는데 그중 한명은 내 바로 옆자리 남자, 또 한사람은 내 바로 앞자리 여자였다. 이 두 사람이 극의 중반까지 무대에 있느라 빠져주니 어찌나 내 자리가 편하던지…
재미있었던 건 원래 대본대로 어느 싯점에서 탈락되어야 할 관객 스펠러가 예상을 뒤엎고 맞추는 바람에 (그것도 10대 초반의 여자아이였는데 거의 찍어서 맞춘 분위기) 배우와 객석 모두가 뒤집어졌다. 난감한 배우들.. 대본에 의하면 다음 차례는 다른 배우가 무대 중앙에 나설 차례인데 다시 그 여자 아이 관객을 불러놓고서는 난생 처음 듣는 단어를 내어 기어이 떨어뜨렸다. 보통은 스펠링 전체를 다 듣고 나서 맞았다 틀렸다를 말해주는데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X’라고 입을 떼자마자 출제자 역의 배우는 ‘C로 시작해 땡!’ 이렇게 바로 퇴장시켰던 것이다. 오늘의 교훈 – 쇼는 필요 이상의 에드립은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면 쇼는 ‘각본대로’ 계속되어야 하므로.
Hot Feet @ Hilton Theater

Hot Feet, a new dance musical conceived by Maurice Hines, featuring music and lyrics by Maurice White, and directed and choreographed by Maurice Hines
흙, 바람 그리고 불 – 십대 시절부터 즐겨들었던 수많은 주옥같은 밴드들의 음악처럼 그들은 영원히 늙지 않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들의 외모를 확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수년전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난 뒤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 일본에서의 공연 실황을 NHK 위성방송에서 우연히 본 것이었다. 가요무대를 즐겨보시는 아버지와 내가 다른게 무엇이더냐. 출연자의 연령대는 어차피 비슷한데…
두 유 리멤바~로 시작되는 셉템바~ 등 주로 ‘바’로 끝나는 단어를 많이 쓴 힛트곡(으음…)을 발표해온 Earth, Wind & Fire의 주옥같은 힛트곡을 엮어서 만든 뮤지컬 Hot Feet. 오랫만에 쇼의 오프닝과 함께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고 불행히도 그 예상이 정말로 맞는 작품을 만났다.. 분홍신에, 페임에, 42번가에 종합선물세트. 그래도 다행이다. 풋루스는 없어서… 어떻게 이렇게 70년대의 정서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 현실적인 촌스러움과 무대 장치들까지 오로지 일부러 일관된 컨셉으로 설정하지 않고서야 원 이럴 수는 없다.. 게다가 요즘 또 흑인 뮤지컬이 칼라 퍼플 밖에 없다보니 한직을 돌고 있는 흑인 댄서들 총출동 분위기.
비록 포 시즌즈의 음악이 뮤지컬 저지 보이즈로 한참 뜨고 있지만 이미 작년과 올해에만도 존 레논, 엘비스 프레슬리, 비치 보이즈의 뮤지컬이 장렬하게 산화해갔다. 미국의 팝 뮤지컬도 이제 성공과 실패의 공식이 점차 드러나는 것 같다.
I Want to dance Better at a Party – Chunky Move
댄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다. 댄스를 전공했던 사람이나 공부한 사람들은 확실히 몸에 집중한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음악과 몸의 소통에 집중한다. 나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아이디어다. 그게 꼭 드라마를 찾는다는 건 아니다. 가끔 드라마가 춤 자체를 완전히 망쳐버리기도 한다. 성악가는 자신의 목소리로, 춤꾼은 자신의 몸으로 모든 걸 다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나같은 무식쟁이는 조금은 더 소통하기를 원한다. 좀 더 다가와 주기를. 그렇다고 메튜 본이 그 해결은 아니다. 가끔 메튜 본의 춤을 보면서 춤이… 모자람에서 오는 기갈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그는 ‘드라마’에 갇힌 때문이다. 춤꾼은 춤으로 터져야 한다. 장르 허물기라는 말이 뭐 신기하기라도 한 듯 한 때 난리였는데, 그 난리가 지나간 후, 장르간의 소통은 봇물 터진 듯 무대 위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그 결과 가운데 하나가 잘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지만 올해 링컨센터 페스티벌에 올라온 줄리 테이머의 그렌델이다. 애당초 아이디어는 좋았다. 고욱지책이었지만. 영상, 몸, 노래, 플레이, 음악… 또 무대. 설레이지 않는가. 장르가 겹칠수록 관객은 더욱 더 무대와 소통할 통로를 더 많이 얻을 수도 있다. 오늘 조이스 극장에서 본 청키 무브의 이 작품은 다큐와 인간의 일상이 겹친다. 다섯 명의 사내의 독백. 춤에 대한. 별 달리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안무가의 절제된 유머감각과 아이디어가 느껴져 좋았다. 특히 몸으로 모든 걸 표현하겠다는 사랑스러운 그 고집이 한 명의 댄서를 자동차에서 컴퓨터까지 변신시키게끔 한 그 뚝심과 유연한 몸에 반했다. 호주 출신의 청키 무브, 왜 자꾸 뉴욕에 오는지 알 것도 같다. 어찌 보면 좀 투박한데도 이들의 춤은 어찌 이리도… 진심이란 말인가.
잘 생긴 몸이 표현력 있는 몸이 아니다. 하지만 표현력 좋은 몸은 눈이 간다. 튈려고 난리 쳐도 물론 눈이 간다. 하지만 의욕만큼 표현력이 따라 주지 않으면 결과는 서글프다. 그러니까… 기초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재능을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몸’의 경우 아무리 재능을 타고 나도 어려서 잘 배워두지 않으면 뼈 굳고는 쉽지 않다. 갈수록 몸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때로 그 몸은 전부다. 무대 위에서 헬리콥터가 날고 바위가 굴러 떨어지고 홍수가 나도 그 무엇도 살아있는 몸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현현하는 몸. 경배하고 또 증오한다.
‘totally new’ Sweeney Todd
Eugene O’Neill Theater, Jun 27th, 2006 @ 8pm
이번에 새롭게 리바이벌 된 패티 루폰과 마이클 세브리스 주연의 스위니 토드. 그것보다는 연출가 존 도일의 스위니 토드라고 하는게 더 맞겠다. 10명의 배우들이 한발짝도 무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연기와 노래는 물론 악기 연주까지 해내야 하는 존 도일의 연출은 확실히 배우를 힘들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부산한 움직임속에서 강렬하고 정제된 연출 미학을 엿볼 수 있었다.
비록 세명만이 살아남고 출연자 모두가 죽는 비극중의 비극인 원작이지만 이번 리바이벌 버젼에서는 그 죽음마저도 새롭다. 죽었던 배우는 피묻은 흰 가운을 갈아입고 천연덕스럽게 일어나 연주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비극속에서도 그 특유의 위트와 라임의 조화속에서 끊임없는 웃음을 선사한다. 거기에 존 도일은 배우들의 노가다를 통해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했다. 죽어도 죽지않는 불멸의 캐릭터들.. 멋지다.
서울의 궁정동에서 경제개발과 계집질에 불철주야 애쓰던 한 독재자가 머리에 총을 맞고 피를 흥건히 방석밑에 적시고 있을때, 이 작품은 뉴욕에서 막이 올라 극중 출연자들이 사정없이 죽어나가며 피를 양동이 채 흘리고 있었다. 이제 당시 공연 실황이 DVD로 발매되어 절찬리에 판매중인데다가 오리지널 연출 무대도 몇년을 주기로 뉴욕 시티 오페라에서 리바이벌되고 있다. 게다가 전혀 새로운 존 도일 버전은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볼 수 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이제 점점 스위니 토드가 왜 가장 뛰어난 뮤지컬 작품인지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기도 지친다. 내가 피력한다고 또 이런 걸작이 나올거라면 몰라도..
70살이 넘어서 비로소 브로드웨이에서 토니상 연출상을 받으며 인정받은 늦깍이 중의 늦깍기 연출가 존 도일. 그의 올해 토니상 연출상 수상 멘트는 그래서 절절했다. ‘성공하고 싶은가? 당신은 결코 늦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그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니까.’ 존 도일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의 건투를 빈다. 물론 2008년에 <컴퍼니>를 같은 버젼으로 리바이벌 한다는 뉴스에는 사뭇 긴장이 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