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재에 ‘존엄’을 붙일 수 있다면…

May 7, 2008 at 12:57 am (On Stage, Review, 마녀 Wrote)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스스로를 비춰 보더라도 다른 인간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다. 믿자, 믿자고 수많은 매체들이 말하는 이유는 결코 믿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 뿐이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의 위대함이 그의 위선과 그의 나약함을 밟고 일어서게 해주는 인간도 간혹은 있다는 사실에는 모골이 송연하다. 자세한 리뷰는 시간 날 때 다시. 필립 그라스는 음악 그 스스로가 무대를 연출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이번에 다시 재확인 했으며 사랑스러운 엽기 괴짜 맥더못이 이제 다른 문을 열고 거장의 대열에 편입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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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믿자

March 15, 2008 at 2:51 am (Uncategorized)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 극장까지 가서 티켓을 산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억을 되돌려 보면 박스 오피스에서 티켓 파는 사람들은 친절하든 불친절하든 어쨋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좌석을 가장자리부터 내주는, 지금도 이해 못할 티켓 시스템을 본 적도 있는데 대체 왜? 어쨋든 그건 오래 전 이야기고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극장에 가서 봤을 때 가장 의아했던 부분은 각종 예매처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이 주르르 늘어서서 극장 로비가 티켓 찾는 사람들로 난장판이었다는 것 정도다. 티켓을 티켓 파크든 클립 서비든 어디서 사든 극장에서 예약한 표를 찾는 창구는 일괄적으로 정리할 수가 없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으나 로비 전체가 난장판이 되는 꼴은 볼만하지 않다.

 여기서 ‘그들’을 믿자는 것은 극장 박스 오피스에서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뉴욕의 극장 박스 오피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뉴욕의 극장에 관련된 노조는 배우 노조, 기술 노조, 오케스트라 노조… 등 외에도 박스 오피스 피플 노조가 있다. 이들이 바로 박스 오피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뉴욕의 극장 박스 오피스의 사람들이 친절하다고는 두 번 깨어나도 말 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박스 오피스 피플은 오프-브로드웨이 까지다. 오프-오프로 가면 드물게 연출가가 티켓 파는 장면도 본 적이 있으니까. 어쨋든 전문적인 박스 오피스 피플은 자신이 파는 티켓의 자리와 공연마다 달라지는 ‘좋은 좌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날짜에 살 수 있는 티켓 가운데 가장 좋은 좌석을 추천해 준다. 물론 우선은 사려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우선 물어보고 그 안에서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점이 바로 그의 의견을 물어볼 시점이다. 그럼 네가 추천하는 자리는 어느 거? 그러면 그는 좌석마다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해 준 다음, 단연 최고는 바로 여기! 하고 짚어준다. 물론 모두가 이런 건 아닌데 길든 짧든 과정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그의 추천 좌석을 믿는 게 좋다. 극장에 들어가서 앉아보면 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가 미소라도 보여주면 안심 되겠지만 실제로 이 사람들은 웃는 법이 거의 없다. 엄청나게 무뚝뚝한 사람들이지만 자세하게 물어보는 사람들을 지겨워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티켓 주세요, 하고 그저 받아들고 계산하는 사람들을 좀 우습게 본다. 뭐냐, 주는대로 받냐? 너 이 공연 정말 보고 싶어 보는 거 맞냐? 하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쨋든 대체적으로 공연의 티켓 가격은 비싸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할인 받는 방법을 간구하기 마련이고 아무리 할인된 좌석이라 해도 그 안에서 가장 좋은 좌석을 확보하는 것은 관객의 권리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마지막으로 주의할 점. 결코 Tkts 에 가서 이같은 짓을 하지 말 것. 그들은 그저 할인된 티켓을 되는대로 팔 뿐이다. 하지만 극장의 구조를 잘 알고 있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 센터나 메자닌의 좌석이 남았는지 세세하게 물어보고 고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Tkts에 줄을 서는 사람들은 극장 구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주는대로 받아 들 수 밖에 없다. 운을 빌 수 밖에. 뉴욕에서 살면서 공연 자체가 나를 배반한 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박스 오피스에서 티켓 파는 사람들은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아무리 퉁퉁거려도 조금이라도 더 물어보기 위해 애쓴다. 결과는 가격대비 성능비로 나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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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were you when I was getting old?

February 25, 2008 at 5:21 am (On Stage, 마녀 Wrote)

30springer-600.jpg     제리 스프링어의 2막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몰아붙이는 대사다. 2막에서 제리가 억지로 떠맡은 토크쇼(0r fucked up ass with barbed wire ㅋㅋ) 아담과 이브도 사과 한 알 따먹었다고 이 지랄이냐며, 애 낳고 아플 때, 자식놈들이 서로 때려 죽일 때, 그 때 당신은 어디 있었느냐고 예수에게 지랄을 해댄다. 그 때마다 예수가 하는 대답은 ‘내 손의 상처를 보고 그런 말을 하냐?’는 항변. 악마는 ‘이 천 년 동안 써먹고도 아직도 지겹지 않냐!’고 지랄.

 ’내가 고통받을 때 예수님 어디 계셨어요?’ 는 아주 오래된 기독교 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의문이었다. 금관의 예수의 가사를 떠올려 보라. 대체 한국이란 나라에 신의 은총 따위가 있기는 있었나 싶었던 지지리 암울한 시절 동안, 대체 신은 어디서 뭐하고 자빠져 있었더란 말이냐.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아무 의미가 없어졌음을 이 쇼는 보여주고 있다. 즉, 신의 존재유무, 신앙심의 유무가 이미 사람들에게 아무 고뇌도 고통도 주지 않는다. 이 질문에서 마리아의 촛점은 내가 고통받고 있었다는 게 아니다. 마리아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그가 늙어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걸 감출 수 없다는 사실이다.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가 어째서 마리아에게 젊음을 돌려주지 않는가. 하다못해 서저리 비용이라도 대줘야지. 물을 포도주로 만들면서 어째서 돌을 금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하는가 말이다.  불과 20년 전 만 해도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었던 존재론… 의미 없음. 에 대한 조롱. 이미 반기독교니 신성 침해니의 개념 따위는 요단강도 사틱스도 다 건넌지 오래인 질문이다. 지금, 오늘 의미있는 질문은,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돈지랄 하며 젊게, 자극받으며 사는 것. 아름답게 ‘보이는 것’ 뿐.  사유가… 의미가 있나? 오늘은 몰라도 내일도? 그저 주워 처먹으며 사는 거 말고…  더? 이 작품을 보고 등골이 서늘한 건… 그래서 나 뿐이 아닐게다. 도덕성의 해이니, 신성모독이니 하는 따위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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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February 25, 2008 at 3:44 am (On Stage, 마녀 Wrote)

김종구

국립극단의 배우들이 ‘연기’에 대한 목마름을 채우고자 스스로 기획하고 저예산으로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에서 올리고 있는 ‘스튜디오 배우 열전’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첫 작품이 꽤 신선했다는 평이 있었지만 놓쳤고 두 번째 작품이라도 보자고 생각하여 도전했는데 하필 두 번째인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는 모노로그. 크헉! 결론부터 말하면, 술 취한 79학번 선배에게 불려나가 80분간 찌질한 신세타령을 졸지도 못하고 무릎 꿇고 듣고 앉았는 바로 그런 드러운 기분. 대본만 곰곰히 들어보면 무척 재밌을 수도 있는 부분도 있고 관객의 긴장을 완화시킬  부분들이 적절하게 들어있건만 이놈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는 시종일관 진지하셔서 아주 진짓상을 말아드시더만. 고흐는 살아 생전에 찌질한 조울증 환자에 알콜 중독, 못생기고 돈 없는, 여자 밝힘증의, 유명해질 리가 없는,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도 알 수 없는, 소리만 고래고래 질러대 말썽 대마왕인 그저 그런 환쟁이었다. 그러나 이 배우가 연기하는 고흐는 이미 거장이셔, 거장. 게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무대 디자인. 여기 저기서 모은 ‘그럭저럭’ 모던해 보이는 장치인 천장에서 전구 늘어뜨리기, 바닥에 높이가 다른 원주 늘어놓기, 배경에 세 장의 대형 캔바스 설치하기.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효율적이지 않은데다, 뭔가 채우려는 몸부림 외의 어떤 의미도 없다. 이를테면 전구를 보자. 노란 백열전구 서른 네 개는 고흐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노랑이더냐. 그러면… 키는 시점이나 끄는 시점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더냐. 왜 켜져 있는지 전혀 의미가 없더구만. 게다가 뒤의 캔바스 셋… 나중에 고흐가 그 뒤로 들어가 먹칠을 하는데… 왜 그르슈? 먹칠을 하면서 또 웅얼웅얼… 그게 아주 짜증이었다. 결국 뭔가 퍼포먼스를 하고 싶었던 거야? 또 높이가 다른 원주 열 넷. 그보다는 차라리 고흐의 방에 놓여있던 그 의자 한 개 놓아두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 열 넷의 원주는 키 작은 그 배우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것도 있어서 거기 걸터 앉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아주 짜증날 지경으로 엉망. 게다가 극이 종반에 이르면서는 배우의 힘도 다 해서 아주 그 때부터는 기계적으로 대사를 외우기 시작. 잠을 자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그렇게 굴곡 없이 편지만 읽으시니 본인도 힘드시겠습니다. 굴곡이 없었냐… 아니… 뭐 소리를 지르기고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고함도 지르지만…어므 다 같은 말이네? 라는 그런 말입니다. 암튼 배우에게 마지막 그나마 박수라고 쳐준 것은 80분 분량의 대사 외우느냐 고생 많았다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동행은 아주 식후의 단 잠을 주무시더라. ㅎㅎㅎㅎ 배우도 관객도 행복한 모노로그를 보여주시라, 제발. 서로에게 못할 짓 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나는 고흐가 두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검은 셔츠, 검은 바지를 입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쯤 해둬. 아무리 검정이 배우들의 색이라고 해도… 이미지상으로 무대 전체가 검정이었다.  검정. 마지막의 그림마저도 검정. 대사톤도 검정. 그렇게 다 먹칠을 해버리고 싶다면… 20분간 불을 끄고 관객을 재우지 차라리.

하지만 트러스에 매다는 조명을 최대한 자제하고 색을 사용하기 보다 자연스러운 색감을 이끌어내고 배우의 얼굴에 집중한 조명은 좋았다. 더불어 한국말을 한국말로 끊어내는 배우 김종구의 말하는 법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말하기는 십 분이 지나가 같은 리듬, 같은 높낮이로 시종일관하여 아무 매력이 없어졌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원주 숫자와 전구 숫자를 세고 앉았던 스스로에게 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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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져?

February 20, 2008 at 3:27 pm (Off Stage, 마녀 Wrote)

        예를 들어보자. 십대 소녀가 있어. 그런데 벌써 결혼할 남자가 있지. 게다가 그는 중년 돌입. 그런데 미처 결혼도 전에 이 소녀가 임신을 했는데 약혼자는 손도 안댔다지, 이 소녀는 아직도 처녀라고 우기지 미치겠는 거야. 말하자면 십대 미혼모가 될 판인데, 이 십대 왈 자신을 임신시킨 건 가브리엘 천사 아니면 하나님 그 자신이라는 거야. 물론 처음 본 사이지. 잠깐, 그러면, 강간? 아니면 보자마자 눈 맞은 거네? 제리 스프링어 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케이스로군. 문제는 이 소녀가 이천 몇 년 전에 아기를 낳은 버진 메리라는 거야.  자 버진 메리가 아들을 낳았어. 중년인 남편은 그동안 십대인 아내에게 손도 안댔다더군. 어쨋든 낳았어. 이 아들이 서른 셋이 되어 죽을 때까지 여자랑 한 번도 안 했다는 거야.  어머, 그렇지, 게이네? 뭐 그런 거지. 문제는 이 아들이 예수라는 것 정도랄까. 뭐 그런 거야.  그래, 너라면 믿을 수 있어? 제리 스프링어 쇼를 보면서 미국놈들 개말종 새끼들 하고 욕하잖아. 그런데 뭐 스토리가 딱 그렇네. 누가 그러드라. 믿어지는 게 바로 ‘은사’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특별한’ 은사야. 제리 스프링어 오페라는 바로 그런 얘기야. 신이 존재할 수도 안할 수도 있어. 하지만 역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종교 집단이 권력인 건 구역질 나거든.  그래도 하나 즐거운 건, 이젠 우리는 아무도 교회의 시위를 두려워 하지 않아. 아, 두렵긴 뭐가. 오히려 너무 신나. 훔쳐 먹는 사과가 더 맛있고 하지 말라는 수영이 더 신나는 톰 소여 일당의 밴 하퍼처럼 우리는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악마의 작은 공범자가 되어 낄낄 웃으며 공연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어. 그러니 부디 앞으로도 잘 부탁해, 시위대 여러분. 재공연 때도 잊지 말고 찾아 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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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벙한 의문

February 17, 2008 at 4:43 pm (Uncategorized)

리처드 포먼의 공연을 보고 나면 드는 생각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대체 무대에서 아방이란 작금에 와서 대체 무슨 의미일까? 갖다 붙이는대로 ‘해석’하는 데 따라서 명작(비싼)이 되기도 하고 졸작(싸구려)가 되기도 하는 현대미술과 같은 것일까. 어쩌다 보니 같이 공연을 보게 된 두 착한 ‘어린이(ㅎㅎㅎ)’가 이해가 안돼요! 하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며 … 이해는 해서 뭐하니, 했지만 결국은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드는 동안 내 머릿속은 온통 두 가지 뿐.  하나는 공연, 하나는 공연 보기 전에 읽던 책. 사회성 제로에 도전한다. 아방은 뭘까, 하는 어벙한 질문.  to be add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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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February 16, 2008 at 2:41 pm (New York, Off Stage, 마녀 Wrote)

6care.jpg

패트릭 스튜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연기를 바로 눈 앞에서 본다면야 그의 듣기좋은  잔잔한 목소리를 침 맞아 가며 다 즐길 수 있겠지만 실제로 천석이 넘는 극장에서는 맨 앞자리도 맨 뒷자리만큼이나 괴롭다. 하지만… 하비 극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이곳이라면 단연 앞자리 불사. 문제는 역시 패트릭 스튜어트다. 런던에서 이 양반이 바로 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런던의 짧은 일정 가운데 이 양반의 맥베스를 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이미 이 양반의 약한 발성에 학을 뗀 적이 있다. 해롤드 핀터의 The Caretaker 에서 이 양반이 바로 그 ‘늙고 더러운’ 노숙자 영감이었다. 어찌나 실망을 절절하게 했는지 노인네에게 박수 쳐줄 기운이 남질 않았었다. 그런데 맥배스라… 그것도 리미티드 공연이다. 함께 온 배우둘은  RSC 배우들이다. 지난번처럼… 다른 공연자들을 믿고 봐야 하나. 문제는 이거 또 패트릭 영감 나온다고들 아주 환장을 하며 달겨들어서 이렇게 고민하다가 표가… 표가 사라진 뒤에는 후회해도 늦는다는 웃긴 사실. 아니 … 뭐랄까… 봐야지. 가끔… 런던에서라면 열외가 될 작품이 뉴욕에 와서 봉이 되는 꼴을 보는데, 이것도 그렇다. 뱀은…  RSC 의 뒷구녕으로 정녕 전락하기로 결심했냐? 가지고 와도… 너무 돈 되는 걸로만 가져오려고 하는 그 속셈이 너무 빤히 보여. 게다가  RSC 도 기획 자체를 돈되는 기획으로 잡는다.  원래 안그랬다고는 말 못해도… 요즘은 뱀과 함께 너무 짜고 치는 고스톱에 판돈 거드는 찜찜한 기분 어쩔 수가 없다. 

 사진은 뉴욕 타임즈,  The Caret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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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인지 시작인지…

February 16, 2008 at 11:58 am (Uncategorized)

숭례문에 불이 나 무너진 뒤 일주일이 지났다.  갑자기들 다 타버린 문 앞에 모여 남의 상가집에서 목 놓아 우는 모양으로 통곡을 하고 난리인 모양이다. 이 문이 처음 탔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한 발짝 물러나게 된다. 어쩔 수가 없다. 처음에는 분명했다. 이 문이 싸그리 타버린 것은 ‘결과’였다. 이래 저래 셀 수도 없을만치 많은 인간들의 책임이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책으로 줄줄이 나열해도 될만치 쌓여온 결과였다. 일주일이 지난 후, 지금은 이것은 그저 하나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의 시작이냐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 수가 있을리야 없지만, 늘 그렇듯이 불이 난 자리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싹이 튼다. 그리고 새 생명이라고 해서 늘 그것이 ‘순진’하고 순수하란 법은 없다. 뭐, 악마도 누군가의 자식새끼 아니었던가.  뭔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뭐 딱히 풍수나, 재앙의 미래예언을 믿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혼돈의 힘으로 간다’는 믿지 않는다. 그건 동쪽 아수라에서 남쪽 아수라로… 그렇게 옮겨다니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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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배끼는 이 천박함

February 14, 2008 at 1:25 pm (Link)

원본인 뉴욕 타임즈 기사

http://travel.nytimes.com/2006/06/09/travel/09hour.html?scp=5&sq=%22joe+allen%22&st=nyt

조선일보에서 배낀 기사

http://spn.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3/2008021301464.html

그것도 자그마치 2006년의 기사를 포맷까지 그대로 배껴서 한글로 된 기사를 읽는 동안 아연실색. 이 기사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네이버였는데, 찾아보니 조선일보. 뭐, 사실 외국 신문 그대로 갖다 쓰는 건 어제 오늘도 아니지만 나름 기획기사라며 뉴욕까지 비싼 돈 쓰고 다녀와서는 한다는 짓이 배끼는 거라니. 대체 왜 갔니? 아마 가기 전에 검색하다 대박 만났다 생각했던 것일까? 공연만 최근작으로 바꿨을 뿐 소개한 레스토랑의 리스트와 그 레스토랑에 관련된 에피소드까지 고스란히 배꼈을 뿐만 아니라 기사 말미에는 여행사이트 광고까지 알뜰하게 해주는 이 천박함. 안그래도 최근에 같은 매체에 글을 쓰는 소위 ’기자’라는 명함 달고 월급 받아먹는 들이 아주 뻔뻔하게 다른 매체에 글을 쓸 때마다 아무 예고도, 레퍼런스도 밝히지 않고 남의 글은 물론 거기에 담긴 생각까지 마치 자기 것처럼 어물쩡 가져다 붙여서 쓰는 – 그것도 엉뚱한 데다가- 꼴을 보며 열이 받던 차였다. 어디 하나씩 하나씩 꼼꼼하게 까발려 볼까 싶다.  배낄 껀수 찾는 시간에 곰곰히 생각이나 더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본인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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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 회수를 건너 …

February 12, 2008 at 6:33 am (On Stage, 마녀 Wrote)

         반은 속아서 봤다. RSC라며! 알고봤더니 1999년에 거기서 처음 공연했던 작품이다. 처음에는 워크샵으로 시작했고 나중에는 인트로 성격의 모놀로그가 아닌 완전한 희곡으로 발전하여 공연되었다.  워낙 바닥에 깔린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아서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끌어가는 힘은 넘쳤지만 문제는 프러덕션의 완성도. 특이 무대 디자인과 의상 디자인은 끔찍했다. 그동안 그 극장에서 본 작품 가운데 단연 바닥을 친다. 이건 모두 연출가의 죄라고 본다. 디자이너가 머리가 없어 그 낮은 무대에 지랄맞게 높은 이층 무대를 만들었겠냐고. 그 넓다면 넓은 무대가 좁다고 판단한 연출가의 판단미스. 배우가 2층에 올라가 서면 그 배우와 눈이 맞는 열의 사람은 오로지 같은 2층의 두줄짜리 객석에 앉은 손님들과 그 바로 아래 위치한 콘솔박스에 앉은 오퍼레이터 뿐이다. 지랄이지. 게다가 배우들은 조명을 피해 머리를 움직이여 하고 심지어는 일 미더 앞에서 얼굴을 비추는 조명을 견뎌야만 한다. 누구를 위한 이층이냐. 그리고 의상… 제발 시접이라도 제대로 해라. 오프닝 공연에 낱낱이 풀린 실밥 달고 나오는 의상은 보고 싶지 않단 말이다. 그 의상, 그래, 스케치는 굉장히 예뻤을 거다. 이해하겠다. 하지만 디자인 잘했다고 일 다 끝난 거 아니거든. 디자인대로 작품이 나와줘야 할 거 아니냐. 누구라도 네가 천 길이 잘못 끊어 한 단 더 단 거 알거 아니냐. 하다못해 바느질이라도 울지 않게 잘 하지 그랬냐. 머리에 웬 부채? 개짜증. 그래도 되도 않는 미국 배우들이 영국식 발음 쓰다 말다 나중에는 다 포기하며 지랄맞게 긴 대사를 세익스피어풍으로 읊게 한 연출가 아줌마… 왜 그러셨어요. 왜! 원작자는 여자, 각색자는 남자, 다시 뉴욕에 와서는 연출가가 여자. 그렇다 보니 이 아줌마 여자 캐릭터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럼 좀 초지일관 하시던가. 무슨 캐릭터가 널을 뛰어. 물론 배우도 못했지만 아줌마 당신 책임이 더 크다. 아무리 봐도… 미국 배우들은… 고전은 집어쳐주세요. 아니… 집어치진 않아도 된다. 잘 하는 거 있잖아. 할 수 있는 한 가볍게, 띄워 주는 거. 얼마나 좋아. 그러니 눈에 힘주고 어깨에 후까시 넣는 건 그만두지… 이젠 좀. 보다보다 부담스럽고 짜증나고 화나고 눈은 피곤하여… 미치는 줄 알았네.

누구 말대로 이 작품은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게 결론.

 그나저나 영국은 아직도 여전히 노예시대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코람 보이도 이 작품도… 은근히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심지어 이 작가는 나이지리아 출신인데도. 뭔가 잘못되도 너무 많이 잘못되었는데 애당초 단추를 잘못 꿰기 시작한 단추 아흔 아홉개 달린 예복이라도 되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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